- 도읍 천도·궁궐 입지·정치 등
- 사회윤리·민생에 중점 실천
- 세종·정조 식견, 선조는 신봉
- 성종·중종은 신뢰 안 하는 편

유교사상이 지배한 조선, 그 최고점인 왕실에서도 풍수는 중요했다. 아니 한국의 역사를 통틀어 풍수문화가 조선만큼 번성한 때는 없다. 왕실의 중요한 행사 날짜를 잡는 것부터 능 자리와 왕궁의 위치를 정하고 도읍을 옮기는 과업까지, 풍수에 의존하지 않고 이뤄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뒤로 북악이 병풍처럼 버틴 경복궁. 평평하고 넓은 터로 산줄기가 모여든 경복궁 터는 명당의 기본조건을 갖췄다. 지오북 제공

책 ‘사람의 지리 우리 풍수의 인문학’으로 주목 받은 경상국립대 최원석 교수가 새 풍수 책을 냈다. 그가 이번에 집중한 것이 바로 ‘조선 왕실의 풍수’다. 서울대 지리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원에서 풍수로 석사학위, 고려대 대학원에서 다시 비보풍수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문화역사지리학회장을 지내기도 한 저자는 풍수를 지리학·문화사·인문학의 영역에서 깊이 있게 탐구해 왔다. 전작이 광범위한 민족의 풍수문화사를 다뤘다면 이번에는 범위를 왕실로 좁혀 보다 깊이 파고들었다.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는 승려가 국가의 풍수를 관장했다면, 조선 때는 풍수도 유학자의 일이었다. 국왕은 자신의 주장과 이익을 풍수에 기대 설득하기도 하고, 신하를 통제하는데 활용했다. 신하 역시 풍수를 매개로 왕과 대립하기도 했다. 태조 이성계가 한양 천도를 논의하는 과정에서 풍수를 내세우자 정도전은 “나라의 통치요체는 인사에 달려있고, 천시(天時)를 판단하는 것이지 풍수에 있지 않다”고 맞섰다.

왕마다 풍수에 기대는 온도도 달랐다. 세종은 풍수에 지식이나 관심이 대단했다. 그럼에도 자신의 묏자리 풍수를 정할 때는 “아버지(태종)와 가까운 곳이면 된다”며 미리 자리를 봐뒀다고 한다. 성종과 중종은 풍수를 신뢰하지 않았고, 선조는 조선 국왕 중에서도 풍수를 유달리 신봉하는 쪽이었다. 조선 왕 가운데 풍수에 가장 깊은 식견을 지닌 이는 정조였는데, 아버지 사도세자의 이장을 위해 여러 풍수서를 독학으로 공부한 뒤 깊은 지식을 갖게 됐다고 한다.

조선 왕들의 풍수에 대한 다양한 태도는 유학자들이 풍수에 대해 가진 이중적인 관점을 드러낸다. ‘세종실록’ 등의 기록에 따르면 유학자들은 나라의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마다 풍수와 관련한 논쟁을 벌였다. 유학자의 본분에 따르자면 묏터풍수를 따르는 목적은 다만 부모를 편안히 모시기 위함이고, 그저 땅의 좋고 나쁨을 따지기 위한 것이지 방위 등을 따져 길흉을 정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풍수는 누구도 부정하지 못했고 어떤 사상으로 배제하지 못했는데, 저자는 이를 선대부터 관행적으로 행해진 ‘강력한 실용성’ 때문이라고 말한다.

조선 초기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세종 문종 세조 성종에 이르기까지 사방 산줄기·물줄기와 궁성을 풍수상 최적인 상태로 배치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 책에서 저자는 6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인경궁 덕수궁)을 통해 조선 궁궐의 입지 경관 배치 그리고 조경의 풍수적 의미를 치밀하게 분석한다.

조선의 왕실은 사회윤리와 민생이라는 유교의 큰 가치 아래 풍수를 실천하려 했고, 자연지형과 사람의 삶터를 잇기 위한 틀로 독자적으로 발전시켰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그러나 조선 후기로 갈수록 미신적인 맹신과 길지 집착으로 재정이 파탄났고, 정치세력가들에게 악용되면서 풍수는 국력을 소모한 주범으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