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0일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어느 가족’(그해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주제 ‘간접적인 언어와 침묵의 목소리’.

　2018년 8월 16일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산책하는 침략자’. 주제 ‘망각의 인류학’(부산 신생 독립출판사 책읽는저녁이 펴낸 영화평론서 ‘영화장화’ 사은품 증정). …

　2019년 1월 17일 나딘 라바키 감독 ‘가버나움’(2018년 부산국제영화제 최고 화제작). 주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2019년 4월 18일 로베르트 슈벤트케 감독 ‘더 캡틴’. 주제 ‘스무 살 청년, 누가 죽였나’. 나치 간부 군복을 우연히 손에 넣은 청년이 괴물로 변해가는 과정을 그렸다는데, 스토리라인에서 엄청난 흡인력이…

　2019년 10월 24일 율리안 로제펠트 감독 ‘매니페스토’. 주제 ‘시대와 역사에 전쟁을 선포한 예술가들’. 이런 영화야말로 ‘좋은 해설’이 붙는다면, 그때 느낌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

	이지훈 대표가 ‘안티고네’ 상영 뒤 강연하고 있다. 시네필로 영화의전당 제공

　이 목록은 2018년부터 달마다 한 번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리는 ‘이지훈의 시네필로’의 그간 행사를 듬성듬성 무작위로 뽑아본 것이다.

　‘이지훈의 시네필로’는 ‘영전(영화의전당)의 조용한 강자’다. 소리소문없이 관객에게 스며들어 영전의 인기 장수 유료 프로그램으로 자리 잡았다. 고정 팬 비중이 높아 흥행 걱정은 별로 안 하는 행사다. 이제 부산엔 그런 프로그램이 많지 않다. 어찌 된 일인지 나는 그간 한 번도 못 갔다. 어쩌다 그린 된 걸까?



　드디어 ‘시네필로’를 처음으로 영접했다. 2020년 11월 19일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안티고네’. 주제 ‘애도와 멜랑콜리’.

　‘시네필로’는 오후 7시 영화를 틀고, 영화가 끝나면 이지훈 필로아트랩 대표(철학박사)가 인문학자의 사유와 소곤대는 이웃집 형처럼 편한 말투 그리고 지금 내 앞에서 말하고 있는 저 사람은 과연 사람인가 AI인가 싶은 생각이 드는 풍부한 해설로 그 영화를 이야기한다.

　공연과 행사를 취재하면서 그게 좋은지 어떤지 판별하는 잣대를 몇 개 갖게 됐다. 그 가운데 열두 글자로 된 주문 비슷한 게 있다. ‘이 좋은 걸 나 혼자 보고 있다니’. 이 생각이 문득 들면 그 공연·행사는 좋다.

	강연 중 ‘안티고네’에 관한 조르주 스테이너의 언급을 소개하는 장면. 조봉권

　소피 데라스페 감독의 ‘안티고네’는 밀도가 엄청났다. 영화 ‘안티고네’를 가마솥에서 끓고 있는 죽이라고 가정하면, 죽이 하도 뻑뻑해 큰 국자로도 잘 저어지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 밀도, 온도, 긴장감…. 스토리는 그렇게 어렵지 않아 대체로 알아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영화는 캐나다 몬트리올을 배경으로 한 현대물이다.

　북아프리카 어떤 곳에서 캐나다로 탈출해 사는 10대 소녀 안티고네의 난민 가족이 주인공이다. 할매,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와 함께 좁은 집에 사는 막내 안티고네는 예쁜데 공부도 잘한다. 짓궂다가 다정하다가를 반복하던 작은오빠는 왠지 사고를 칠 것 같더니 진짜 사고를 친다. 알고 봤더니 작은오빠는 조폭과 연루된 사람이다. 직업이 축구선수이고 사람 좋은 큰오빠도 실은 사정이 비슷하다. 안티고네는 이걸 모른다.

　큰오빠가 죽고 작은오빠는 경찰에 잡혀가면서 가족에 엄청난 위기가 닥친다. 안티고네는 자기를 희생해 이 가족을 구해내려고 한다. 어마어마한 비극의 소용돌이가 덮쳐온다.



　많은 분이 ‘안티고네’ 이야기가 서양 비극의 원류·원형 가운데 하나인 점을 알 것이다. 부산시립극단 김지용 예술감독이 지난해 선보인 연극 ‘테베 3부작’에서도 안티고네 이야기를 솜씨 좋게 ‘요리’한 바도 있다. 우리의 ‘춘향전’, 일본의 ‘주신구라(충신장)’가 하나의 문화 원형을 보여주며 끝도 없이 변주되는 것과도 비교해볼 수 있겠다. 이지훈 대표는 이날 소포클레스의 고대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를 시작으로 끝나지 않을 듯한 이야기 실 꾸러미를 풀어냈다.

	지난 11월 19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 소극장에서 열린 ‘이지훈의 시네필에서 이지훈 대표가 카빌리아 임시정부의 깃발을 해설하고 있다. 시네필로 영화의전당 제공

　그날의 실 꾸러미를 여기 다 풀어놓을 수는 없으니 일부만 소개한다. 소포클레스는 ‘안티고네’ 이갸기를 쓰고 35년 지나 두 번째 안티고네 캐릭터를 만든다. 두 번째 캐릭터는 원래의 저항하는 여성 영웅이라기보다 상냥하며 헌신하는 딸이다. 근대 르네상스 이후 유럽 작가들은 이 두 번째의, 애정 깊은 안티고네에 초점을 맞춘 듯 안티고네를 기독교 관점의 성녀로 묘사한다. 심지어 잔다르크 코드가 안티고네에 들어온다.

　20세기 장 콕토는 안티고네를 저항하는 여성 영웅으로 만들어낸다(장 콕토의 연극 ‘안티고네’는 피카소가 무대미술을, 코코 샤넬이 의상을 맡았다. 후덜덜.) 1948년 브레히트의 ‘안티고네’는 나치를 비판하고, 카뮈의 ‘안티고네’는 크레온을 인간화하며, 주디스 버틀러가 본 안티고네는 이러이러한데 결국 라깡에 와서 안티고네는…. 이 모든 이야기가 결국 영화 ‘안티고네’와 밀접히 만남을 강연으로 알게 된 뒤, 소름이 끼쳤다. 이 영화 한 편의 밑바닥에 이렇게 많은 요소가 얽혀 있단 말인가. 영화 ‘안티고네’가 비로소 입체로 보였다.



　사실, 할 말은 더 많다. 영화 속에서 무심히 칠판에 써놓은 불어 문장이 실은 브레히트가 쓴 ‘안티고네’의 한 대목임을 찾아낸 이야기, 알제리 북부 카빌리아의 베르베르족이 난민이 된 사연, 카빌리아 임시정부 깃발이 영화에 슬쩍 나오는데 그 깃발 속 문양은 올리브이며 그 깃발 속 글씨가 ‘야즈(YAZ)’라는 피임약 브랜드와 이어진다는 설명…. 피임약이 왜 거기서 나와?

	관객이 이지훈 대표의 강연을 경청하고 있다. 조봉권

　‘시네필로’를 처음으로 보고 나오면서 솔직히 덜컥 겁이 났다. ‘내가 지금껏 본 숱한 영화도 실은 오늘처럼 다양한 배경과 맥락이 있었는데 그걸 못 보고 그냥 겉만 보고 좋아했던 것 아냐?’ 하는 생각이 든 거다.

　이지훈 대표는 부산대에서 분자생물학과 철학을 공부해 철학 석사를 받은 뒤 프랑스 파리1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그때 박사 논문이 그 해 최우수평가를 받았다. 그 뒤 그 대학에서 미학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오래 전 술자리에서 이지훈 박사가 무심히 “그때 박사학위 논문이 최우수평가 받았을 때 사람들이 기립박수를 쳐주더라고요…”라고 말했던 게 기억났다.

　강연 듣다 문득 든 생각을 밝히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이 좋은 걸 나 혼자 보고 있다니’.선임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