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산 피란민촌서 태어난 건축가
- 국가건축정책위원장 겸 市 고문
- 14일간 유럽 종교 건축물 기행
- 성당·수도원에 얽힌 이야기와
- 이동 경로, 순례 목적 등 소개
- 수도사 생활 규칙도 흥미로워

‘수도원’이란 말을 들으면 두 개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먼저 오래전 책으로 읽고, 영화로 봤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다. 에코 특유의 어마어마한 지적 분위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수도원은 신성하고 경건하면서 은밀한 공간이라는 기억이 남아 있다. 또 하나는 수도원 생활을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위대한 침묵’(2005)이다. 제목에서 암시하듯 2시간50분 동안 대사는 거의 없이 수도사들의 생활을 너무도 담담하게 그려 굉장히 괴로웠던(?) 추억이 또렷하다.

프랑스 알프스 깊은 산중에 있는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 지금도 수도원 2㎞ 내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으며 관광객은 2㎞ 밖에 있는 박물관만 볼 수 있다. 돌베개 제공

건축가 승효상의 신간 ‘묵상’을 손에 들자 두 개의 이미지가 겹치면서 설레기도, 망설이기도 했다. 책 속으로 쑥 들어가기 전에 저자부터 소개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건축가 승효상은 대통령 직속기구인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며 부산시 도시건축정책 고문이다. 저자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듯하다. 특히 한국전쟁 때 부산 구덕산 아래 피란민촌에서 태어나 구덕 교회에서 자랐으며 한때 신학 전공을 꿈꿨을 만큼 신앙심이 깊다. 그가 ‘비움의 아름다움’을 주장하며 ‘빈자의 미학’을 건축 철학으로 세운 배경에는 종교적 사유가 자리 잡고 있으며 수도원 순례에 나선 것도 그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이번 순례는 저자가 참여하는 건축 공부 조직 ‘동숭학당’의 여름 기행으로, 14일 동안 이탈리아 로마에서 프랑스 파리까지 수도원과 성당 등 종교 건축물을 보고 사색한 기록을 담았다.

책은 500쪽을 넘길 만큼 두껍다. 그만큼 꼼꼼하고 방대하다. 순례를 가게 된 계기와 목적, 14일 동안의 이동 경로, 각 수도원과 성당 소개뿐만 아니라 종교와 건축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성당과 수도원은 유럽 건축의 백미다. 당연히 그에 얽힌 종교와 건축에 관한 일화가 무궁무진하다. 그동안 성당은 관광지로 많이 알려졌지만 수도원은 베일에 싸인 신비한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저자는 그 베일을 조금 걷어낸다.

수도원의 유래와 공간적 배치, 수도사들의 생활 규칙 등이 흥미롭게 등장하는데 다큐멘터리 ‘위대한 침묵’을 촬영한 프랑스 ‘그랑드 샤르트뢰즈 수도원’을 방문한 장면은 이 책의 하이라이트다. 프랑스 알프스의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수도원은 1000년 가까운 역사를 간직하고 있으며 여전히 반경 2㎞ 내에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위대한 침묵’으로 공개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외부에 문을 연 적이 없으며 다큐멘터리 촬영도 필립 그로닝 감독이 처음 제안한 지 16년 만에 허락이 떨어졌다.

이와 함께 저자가 20세기 최고 건축가로 꼽는 스위스 태생 르 코르뷔지에(1887~1965) 이야기가 곳곳에 나온다. 무려 열일곱 개의 건축물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시킨 코르뷔지에의 최고 작품이 자신의 묘역이었다고 묘사한 대목에서는 눈을 뗄 수가 없다.

만약 유럽의 종교 건축물에 관심이 많고 경제적 여유가 있다면 이 책의 순례 경로를 참고하면 될 것 같다. 특히 여행 중 가장 골치 아픈 잠자리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수도원을 숙박 시설로 전용해 쓰거나 겸용하는 곳이 많아 수도원을 활용하면 된다. 인터넷 사이트 주소는 책 속에 있으니 궁금하면 찾아보기를 권한다. 경제적 여유가 없다면 이 책으로 간접 경험해도 나쁘지 않다.

김희국 기자 kuki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