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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주의 그곳에서 만난 책 <59> 만년필연구소 박종진 소장의 ‘만년필 탐심’

40여 년 만년필 덕후 “펜촉 보면 얽힌 추억도 보여요”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9-05-26 18:38:13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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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3 때 부친 만년필 보고 ‘입덕’
- 벼룩시장 헤매고 잉크 직접 제조
- 골방서 종일 써보고 만년필 분해

- 2007년 연구소 열어 지식 공유
- 주말엔 무료로 만년필 수리까지
- 전국 각지서 찾아와 줄 잇기도

- 펜촉 닳은 것만 봐도 습관 짐작
- “쓰는 사람 추억·삶 배어 있어
- 서랍 속 잠든 만년필 꺼내보길”

편지 대신 스마트폰으로 문자를 보내고, 컴퓨터로 거의 모든 문서를 작성하는 세상이다. 그래도 손글씨와 필기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연필, 볼펜, 만년필 등 여러 필기구 중에서도 만년필은 조금 더 특별한 느낌을 준다. 잉크만 공급되면 펜촉이 닳아 없어지지 않는 한 계속 쓸 수 있다는 점에서 실용적이다. 오래 사용하는 동안 만년필은 어떤 상표의 제품인가를 떠나 그 주인에게는 손에 딱 맞게 길들여진 명품이 된다. 우리나라 최초이자 유일한 만년필연구소를 운영하는 박종진 소장이 ‘만년필 탐심’을 냈다. 서울 을지로 3가 만년필연구소에서 박 소장을 만났다.
   
박종진 만년필연구소 소장이 서울 을지로 3가 사무실에서 작업 중 미소를 짓고 있다.
■ 초등학교 3학년, 만년필에 반하다
서울 가는 기차 안에서 문득 한 만년필이 떠올랐다. 바스콘셀로스의 ‘나의 라임오렌지나무’를 원작으로 한 영화에서 본 만년필이다. 주인공 제제가 들고 있던 만년필의 종류가 궁금했다. 제제는 아빠보다 자기를 더 사랑해주는 뽀르뚜가 아저씨에게서 만년필을 선물받는다. 뽀르뚜가 역시 유산으로 물려받은 소중한 만년필이다. 제제는 뽀르뚜가가 사망한 뒤, 그 만년필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만년필은 중요한 장면마다 의미 있는 소품으로 등장한다. 제제가 만년필을 들고 있는 영화 장면을 검색해 찾은 뒤, 박 소장에게 사진과 질문 문자를 보냈다. 곧바로 답이 왔다. “파커51입니다.” 사진만 보고 바로 알다니, 깜짝 놀랐다. “파커51 중에서 상위 기종, 파커51 Signet입니다. 1949년 등장합니다. 100분의 1 확률로 Presidential Deluxe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 답만으로도 인터뷰를 다 한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박 소장은 우리나라 만년필 세계에서 이름보다 ‘파커51’이라는 별명으로 더 많이 알려진 인물이다. 게다가 40여 년 만년필을 수집하고 연구해온 인물이다. 사진만 보고도 알아보는 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박 소장은 1970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처음 아버지의 만년필을 보았다. 아버지는 퇴근하고 집에 오면 만년필로 뭔가 기록했다.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좋았어요. 누나도 가진 만년필을 나도 가지고 싶었죠. 만년필에 푹 빠진 거죠. 필기구에 대한 남다른 욕심이 있었던 것 같아요. 네 살 때 애니메이션 ‘플란더즈의 개’를 보면서 주인공 네로가 그림을 그리는 장면에 반했죠. 나도 붓을 가지고 싶어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구해 붓을 만들겠다고 끄트머리를 돌로 두드리곤 했지요. 그러니 잉크를 넣어가며 쓰는 만년필이 얼마나 신기했겠어요. 초등학교 3학년 때 용돈 500원을 아껴 모아 문방구에서 만년필을 샀어요. 가짜 파커51. 그게 제 생애 첫 만년필이었습니다. 제대로 사용할 줄 몰랐지만요.”

그때부터 시작된 만년필 사랑이었다. 박 소장은 40여 년을 만년필에 꽂혀서 온 인생을 바치며 살고 있다. 틈만 나면 만년필을 찾아 벼룩시장을 헤매거나, 취향에 맞는 잉크를 마련하려고 직접 제조했고, 골방에서 종일 만년필을 써 보고 분해했다. 만년필을 연구하고, 수집하고, 자료를 모았다. 2005년부터 만년필 동호회 ‘펜후드’를 운영해왔고, 2007년 만년필연구소를 열어 만년필 좋아하는 이들과 지식을 공유한다. 평상시에는 회사원이지만 주말에는 만년필연구소 소장이 되어 무료로 만년필을 수리해준다. 1년에 두 번 ‘서울 펜쇼’도 열고 있다. 만년필 이야기를 담은 두 권의 책, ‘만년필입니다!’ ‘만년필 탐심’을 펴냈다. 말 그대로 만년필을 통해 세상을 보는 사람이다.

■ 만년필, 사람, 마음 그리고 추억

   
만년필 탐심 박종진·2018·틈새책방
만년필연구소는 서울 지하철 을지로3가역 가까이에 있다. 오래된 건물 4층에 사무실 한 칸을 마련했다. 매주 토요일이면 전국 각지에서 만년필을 수리하려고 찾아온 사람이 계단까지 줄을 서서 기다린다. 그 모습이 궁금해 토요일에 찾아가고 싶었지만, 방해가 될 것 같아 수요일 방문했다. 사무실 공간 대부분을 차지한 큰 책상에는 지난 주 작업한 흔적이 남아 있어 복잡해 보였다. 토요일 오전 9시부터 준비해, 오후 3시쯤 문을 열어 밤 10시 넘어 끝난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죠. 수리를 맡기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수리를 맡기는 데 시간이 걸리다니, 이건 무슨 뜻일까. “만년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알아야죠. 어떻게 쓰다가 왜 고장 났는지, 만년필을 쓰는 사람의 습관과 문제점을 알아야 고칠 수 있어요. 그래서 수리라기보다 추리에 가까워요. 수리가 끝나면 만년필로 글씨를 써보라고 합니다. ‘만년필을 고장 내는 손’이 있어요. 펜촉 닳은 것만 봐도 그 주인이 만년필을 잡는 모습을 짐작할 수 있어요. 그 모습을 알면 수리할 수 있죠.”

박 소장 앞에서 필자도 만년필을 잡아보았다. “연필을 잡는 것처럼 중지로 받치고 너무 힘을 주는군요. 만년필은 손가락을 모아 부드럽게 잡아야 해요. 중력에 의해 가느다란 틈으로 잉크가 흘러나오니까 힘을 줄 필요가 없어요.” 필자의 만년필이 늘 망가졌던 이유를 중학교 이후 처음 알았다. 그동안 망가뜨린 만년필들에게 미안했다.

책에서 만년필에 얽힌 역사와 이야기를 읽는 것도 재미있지만, 만년필에 담긴 추억을 다룬 글은 감동을 준다. 책에 가슴이 찡해지는 만년필 이야기가 한 편 있다. 몇 년 전 한 사람이 누나가 45년 전에 회사 노래자랑에서 상품으로 받아서 쓰다 물려준 낡은 파커21을 수리하러 왔다. 그 사람에게는 돌아가신 누나를 떠오르게 하는 소중한 유품이었다. 박 소장이 만년필을 수리하면서 보니 가짜 파커21이었다. 하지만 그 사람에게 가짜라는 말을 해주지 않았다. 박 소장은 만년필을 고친 것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게 해준 것이다. 그는 “만년필마다 역사가 있어요. 사람과 마음이 배어있는 거죠”라고 말했다.

   
책에 이런 대목이 있다. “계속 사용하다가 고장이 난다면 오히려 고치기 쉽다. 그러나 오래 방치된 펜은 오히려 어렵다. 오래된 병이 오랜 치료를 요하는 것처럼.” 책상 서랍에 잠든 만년필을 다시 찾고 싶다. 방치된 마음과 시간을 꺼내 보고 싶다. “독자들이 그런 생각을 한다면 이 책은 임무를 완수한 것”이라는 박 소장의 바람이 주문처럼 통했다.

책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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