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부도의 날’(2018)은 1997년 IMF 사태를 맞았던 과거 한국사회의 풍경을 단순화해 소묘한다. 이 영화의 영리한 점은 편집에 있다. 외환위기에 대응하는 경제 정책 관계자, 파국을 맞는 일반 시민들, 위기를 이용해 이득을 보는 소수의 사람으로 분리된 세 개의 축을 교차편집으로 이어붙임으로써, 위로부터의 결정이 아래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는지 연쇄적 과정을 훑어 내려간다. 상부의 변동이 하부구조에 미치는 파급효과에 대한 이야기. 다만 여기에는 일종의 함정이 있다. 실제 현실과 영화를 접하는 이 시대 사람들의 심상이 빚어내는 정서적 풍경은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들여다보면 영화는 사실관계에서 틀린 점을 적잖이 노출한다. 한국 정부는 최대한 IMF행을 피하고자 노력했지만, 금융시장의 개방을 의도했던 미국 정부의 압박에 굴복했다는 것이 실상에 가깝다. 협상 진행 과정에서 관료와 재벌, 노동계가 얽힌 복잡다단한 이해관계는 영화에선 대거 삭제되었다. 한 편의 영화가 방대한 시대의 층위를 한데 아우르는 건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정부는 항상 무능하거나 악하며, 국민은 늘 선량한 피해자’라는 이분법적 도식, 집단적 피해 의식의 렌즈를 통과한 선악 구도의 서사로 역사를 편리하게 가공하는 순간, 우리는 현실의 수많은 면면을 놓치게 된다.

상업적으로 검증된 대중영화의 도식 안에 역사를 끼워 맞추는 태도는 ‘1987’(2017)에서도 찾아볼 수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은 민주화를 위한 거국적 투쟁이었지만, 합법적 절차를 거친 선거의 결과는 군부정권의 연장이었다. 영화는 그 실패의 직전에 시간의 장막을 닫음으로써 단합한 국민의 승리라는 인상을 빚어내고 이후의 일에 대해선 고의적으로 침묵한다. 거대 악과 정의의 충돌, 국난극복이라는 한국형 사회파 영화의 상투적 플롯을 반복 재생산하기 위한 소재로서 끌려 나온 역사는 촛불 시위의 역사적 대응물이란 식으로 재정의되어 임의로 편집되고 마는 것이다.

	‘1987’

더욱더 우려스러운 건 점점 한국 상업영화의 소재가 이런 식의 현대사에 대한 영화적 재현으로 쏠리는 경향이 심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품의 완성도 여부는 차치하고서 ‘더 킹’(2017) ‘공작’(2018) ‘국가부도의 날’ ‘스윙키즈’(2018)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연출자를 거친 영화의 오프닝들이 한결같이 과거의 사건을 담은 뉴스릴의 몽타주로 열린다는 사실은 실로 의미심장하고 징후적이다. 이상의 영화들은 민주화운동과 남북관계, 경제위기 등 현재의 사회정치적 이슈에 대응되는 사건을 통과해 우회적으로 작금(昨今)의 세태를 다루어 대중의 시대정신에 부응하려는 의도의 소산이다.

그러나 과거를 경유해 현재를 이야기함은 어디까지나 역사적 은유이자 재확인에 그칠 뿐, 날 것의 현실에 대한 정직한 증언과 반영은 되지 못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영화계에는 과거라는 이름의 유령이 맴돌고 있다. 주류 영화의 시선이 윤색된 과거의 재현을 향해 있는 동안, 당장 이 순간 한국사회의 즉물적(卽物的) 실제에 대한 관심은 뒤안길로 내몰려 저예산 내지 독립영화의 면면을 통해서 목격할 수 있게 되었다. 역사라는 이름의 함정에 빠진 한국 영화는 점점 ‘실재의 사막’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복제된 과거가 시뮬라크르(Simulacres: 실재를 압도하는 가상)로서 현실을 뒤덮고, 현재의 시간은 역사라는 이름의 흑공(黑空)으로 빨려들어 잠식당하고 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