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문춤패 기세가 하늘 찌르던 때
- 개인이름 내건 신인춤 제전 탄생
- 졸업 앞둔 춤꾼에 꿈의 무대건만
- 학교 눈치 보느라 포기자 속출
- 젊은 예술가의 가능성 열어주길
‘젊고 푸른 춤의 새내기들이 벌이는 이 작은 춤판, 이 작은 몸짓으로 삶의 그늘을 걷어내기엔 벅찬 노릇입니다마는, 그래도 그것이 소중한 것은 새 세기를 향한 밝은 전망의 씨앗을 뿌리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채희완 ‘춤의 세기를 기약하는 작은 몸짓’. 2000년 ‘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 공연 팸플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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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해 열린 신인춤 제전-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에 선보인 김동윤의 안무 ‘바쁘게 살아가는 이유’. 사진가 박병민 제공 |
1980년대 부산 대부분 대학에 무용학과가 생기면서 이른바 부산의 ‘대학무용 시대’가 열렸다. 대학무용 시대는 90년대 말까지 이어진다.
1995년 부산 춤의 판도를 바꿀 중요한 공연 하나가 기획됐다. 당시 남구 대연동에 가람예술센터 소극장에서 민족미학연구소(소장 채희완) 주최로 열린 ‘제1회 신인춤 제전-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이다. 이 시기는 대학 동문 춤패의 기세가 하늘을 찌를 때였다. 규모 있는 공연 대부분은 각 대학 무용과 동문 춤패의 공연이었고, 개인 공연이 드물었다. 갓 대학을 졸업한 새내기가 자기 이름으로 작품을 발표하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이런 상황에서 민족미학연구소 채희완 소장(당시 부산대 무용학과 교수)은 대학을 졸업하는 춤꾼이 예술계에 발을 디딜 첫 무대를 만들어 주었다. 그 시절 이 무대가 대학 졸업 직후 자기 이름을 걸고 춤출 수 있는 무대로는 유일했으니 얼마나 귀한 기회였겠는가. 신인춤 제전이 해를 거듭하면서 무용과 졸업을 앞둔 춤꾼들은 신인춤 무대에 서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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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제3회 신인춤 제전-젊고 푸른 춤꾼 한마당의 포스터. 재정 상황이 열악해 제3회 때에야 비로소 처음으로 포스터를 제작했다. 그것도 이면지에 인쇄했다.
김정희 제공 |
하지만 쉽지만은 않았다. 신인춤 무대 출연을 교수가 허락하지 않아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기에 섭외 담당이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허다했다. 졸업하더라도, 계속 활동하려면 교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프로그래머는 출연자를 섭외할 때 “(교수 허락 없이) 출연해도 괜찮겠느냐” 또는 “허락을 받았냐”는 물음을 빠짐없이 던졌다. 이렇다 보니 신인춤 무대에 편하게 출연하는 춤꾼은 교수 눈 밖에 났거나, 졸업하면서 인연을 끊는다는 생각으로 참가를 결심한 경우가 많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신인춤 제전은 올해까지 24회를 이어왔다. 신인춤 제전을 거쳐 간 부산, 영남의 춤꾼은 수백 명을 헤아린다. 현재 활동하는 20대에서 40대 중반까지 춤꾼 가운데 신인춤 무대를 거쳐 간 이가 반 이상이다. 그들은 부산만이 아니라 국내외 곳곳 춤판을 채우고 있다. 신인춤 제전은 대학무용의 전성기를 뒤로하고 부산에서 ‘춤꾼의 시대’를 열었다. 춤꾼의 시대는 춤에서 집단에 매몰된 예술가 개인을 회복한 시기이다. 이후 부산 춤판은 개인과 소규모 단체의 활동이 활력을 띠었고 지금에 이르렀다.
대학에서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지만 한 사람의 예비 예술가이기도 하다. 하지만 학교에서는 집단의 이름으로 이들의 가능성은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의 도구처럼 소비한다. 집단에 얽혀 예술가로서 성찰과 고민의 시간을 놓친 이들은 그곳을 벗어나면서 아예 춤의 길을 접는 안타까운 선택을 한다. 씁쓸한 기분이 드는 것은 30년 정도 부산 춤판을 기웃거렸지만, 별로 달라진 점을 나는 찾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개인의 가능성을 억압하고 소비하면서 집단과 권위의 이름으로 만든 공연은 아무리 좋은 평을 받는다 해도 나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
12월이면 민족미학연구소는 다음 해 봄 신인춤 무대에 오를 젊고 푸른 춤꾼을 모시기 위한 기획에 들어간다. 신인춤 제전은 패기 있는 시도와 실수가 용납되고 격려받는 무대다. 무용과가 사라지는 현실에서 이런 무대에 설 춤꾼을 찾기가 점점 힘겨워진다고 한다. 집단의 이름과 권위로 젊은 예술가를 소비하고 탈진시키는 상황을 바꾸지 않는다면 젊은 예술가가 사라지고 공연을 함께할 춤꾼을 찾지 못해 헤매는 현실은 달라지지 않는다. 미래가 축적된 현재라면 당장 바꾸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분명하다. 제발, 그들의 이름으로 춤추게 하라.
춤 비평가·민주주의사회연구소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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