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5년 건축모습 보존한 작품
- 주민들 이야기 흐르는 전화기 등
- 개발로 사라지는 골목의 기억
- 초량 일식가옥서 30일까지 전시

부산 중구 영주동 일대 ‘불란서식 주택’의 현관문 장식 문양을 담은 6쪽짜리 병풍. 콘크리트에 덮인 영주동 옛 물길과 소리의 흔적을 찾는 과정을 담은 35분짜리 영상. 동구 초량동 주민들의 구수한 이야기가 흘러나오는 구술 전화기까지.

부산의 산복도로 마을을 탐방하고 연구한 결과가 예술로 다시 태어나 지역민들과 만나고 있다. 사진은 정만영 작가의 사운드 설치 작품 ‘구술 전화기’. 초량1925 제공

옛것과 새로움이 공존하는 부산의 원도심. 부산의 한 문화예술단체가 지난 3년간 영주동, 초량동과 수정동 산복도로 마을을 탐방하고 연구한 결과물이 예술로 다시 태어났다. 문화재청 등록문화재(제349호)인 초량동 일식 가옥에서 열리고 있는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 오르다 내리다’ 전을 통해서다.

이번 전시를 주최한 초량1925는 부산 원도심의 정체성을 연구하고 지역의 생활문화와 예술을 매개하는 문화예술단체다. 사운드 설치 미술가 정만영 작가와 부산대 우신구(건축학과) 교수가 주축이 돼 지역 문화예술 발전을 돕는 일맥문화재단의 후원으로 2014년 결성됐다. 2015년과 2016년 초량동과 수정동에서 ‘골목의 기억 도시의 상상’ 프로젝트를 진행했으며, 지난해에는 중구 영주동으로 범위를 확장했다. 부산문화재단 등의 지원을 받은 이 프로젝트는 여러 분야 예술가와 건축가, 향토사학자 등이 초량동과 수정동, 영주동을 둘러보며 건축, 근현대 사료 연구, 미시사 연구, 소리 아카이브, 시각예술 등의 관점으로 공간을 연구하고 기록한 작업이다.

전시에서 김덕희, 김보경, 송성진, 여상희, 정만영 등 5명 작가가 참여한 영주동 아트 리서치를 중심으로 지난 3년간의 프로젝트 결과물을 선보인다. 전시회 제목 ‘오르다 내리다’는 영주동의 수많은 계단을 상징하는 동시에 초량동 일식 가옥 주변의 대규모 고층 아파트 공사로 인해 고립되는 공간을 은유한다. 신축 공사로 훼손돼 가는 문화재 공간은 한쪽의 올라감에 따라 한쪽이 내려가는 차이를 발생시키며 고립과 파괴를 보여준다.

지난 22일 동구 초량동 일식 가옥에서 열린 좌담회 모습.

1층에는 김보경 작가가 영주동 ‘망양로 383번길’을 오르내리며 보았던 길의 이야기를 담은 영상 작품을 비롯해 초량 1925팀이 발품을 팔아 영주동의 주요 장소를 지도 위에 옮긴 ‘영주 2017’, 그린그림스튜디오의 사진 아카이브 등이 전시돼 있다. 우신구 교수팀이 주요 건축물과 옛길 조사를 통해 쓴 ‘영주동의 재건, 재건축 그리고 재생’ 자료도 볼 수 있다. 2층에 올라 탁자 위에 놓인 아날로그 수화기를 들자 동네 어르신들의 구수한 이야기가 흘러나온다. 정만영 작가의 소리 아카이브 ‘초량동 이야기’다. 건물 밖으로 나가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여상희 작가가 산복도로 지형의 특징 중 하나인 영주동 축대벽을 재현한 ‘영주동 요철’을 만날 수 있다. 1925년 건축 모습을 그대로 보존한 공간의 안팎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전시를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시를 총괄 기획한 정만영 작가는 “지난 3년 동안 도시개발로 사라져가는 산복도로 골목을 리서치한 것을 갈무리하는 전시”라며 “부산 전역에서 쓰나미처럼 재개발이 진행되고 있지만 기억과 기록을 담은 공간은 하나도 없다. 이번 리서치를 통해 공간과 환경의 미래에 대해 다 같이 고민해보고 대안을 찾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전시는 오는 30일까지 오전 11시~오후 6시. 일요일 휴관.

정홍주 기자 hjeye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