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책보다 과학상자가 좋았던 소년
- 초6 때 동화 3편 쓰며 문학 길로
- 고교 땐 단편소설만 30편 집필
- 완성도 혹평에도 열정 이어가

- 자화상 그리겠단 소망 담은 책
- 치매어머니와 아들 등 12편 엮어
- 성장하며 느낀 모든 정서를 글로
- 소설 아닌 삶 이야기 듣는 기분

“고개를 오르내리며 어머니는 산갈치 얘기며 대꽃 얘기처럼 황당한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중략) 마치 그 무렵은 이야기 속에서 사는 것 같았다. 어떤 얘기는 수십 번도 더 들었다. 때로 나는 잠이 들어서 얘기를 다 듣지 못할 때가 있었다. 내가 신열 속에서 꾸는 꿈처럼 이 세계가 황당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전성태 소설가의 단편 ‘이야기를 들려드리다’ 한 대목이다. 혼불의 환영을 본 어린 아들의 뜨거워진 이마를 식혀주려고 어머니가 끊임없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다. 전성태의 유년 시절에 있었던 일이구나 짐작했고, 그 소년이 소설가가 됐구나 생각했다. 가을 초입, 충남 천안에서 그를 만났다. “불당동에 천안에서 유명한 베이커리가 있어요. 커피도 맛있어요. 집과 가까워 자주 가는데, 야외 테이블을 좋아해요. 단골이 많아 야외에 빈자리가 없을 때도 많죠. 언덕 나무들을 보며 계절도 느끼고, 책 읽고, 생각도 정리하는 장소예요.” 그의 말처럼, 오후의 야외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천안시 불당동의 단골 카페에서 전성태 소설가가 ‘몸에 새겨진 이야기’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원고지 200장 SF 쓴 초등생

전성태는 1969년 전남 고흥에서 태어났다. “녹동항 가기 전에 있는 도덕면에서 나고 자랐어요. 도덕초등학교, 도덕중학교를 다녔죠. 시골이라 읽을거리가 없었고, 과학자가 꿈이었어요. 어느 날 학교 앞에서 전집을 파는 가판대를 봤습니다. 책을 사면 현미경이 들어있는 과학상자를 준다는 말에 마음을 뺏겼어요. 그게 가지고 싶어 형님께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5남1녀 중 다섯째거든요, 동생 소원을 거절 못 한 형님이 월급 절반을 털어 사줬지요.” 과학상자를 먼저 열었다. 실컷 본 뒤 비로소 책이 눈에 들어왔다. ‘수호지’였다. 첫 책 읽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글쓰기도 자연스레 뒤따랐다. “혼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6학년 때 동화를 3편 썼어요. 우주여행을 주제로 소설도 썼죠. 제목이 ‘우주 삼총사’였습니다.” 그 소설이 자그마치 원고지 200장 분량이었다. 초등생이 쓴 SF소설은 행방이 묘연하지만, 과학자의 꿈이 소설가로 기우는 순간이었다.

순천 매산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을 그는 “혼자서 문학을 열심히 했다”고 추억했다. 친구 서너 명과 동인지 ‘다릿돌’을 만들었다. 단편소설도 30편 정도 썼다. 공부는 언제 했을까 궁금할 정도였다. 그의 작품 하나를 읽은 인근 학교 교사는 냉정하게 말해줬다. “‘선데이서울’에 나올 법한 이야기”라고. 완성도는 둘째 치고, 단편 30편을 써낸 열정이 놀라웠다. 그가 소설가가 된 건 당연한 결과였다는 생각이 든다. “고3 때 진로를 고민하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문학이라는 사실을 확인했죠. 소설가가 되려고 중앙대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습니다. 형들이 있어서 믿고 그런 결정을 내렸죠. 형들이 등록금도 내주고 자취방도 구해줬지요. 한참 뒤 아버지가 ‘집안 생각은 안 하고 자기 좋아하는 대로 산다, 좀 섭섭했다’고 하셨다는 걸 들었습니다.”

군대를 다녀와 대학 3학년이던 1994년 ‘실천문학’ 신인상을 받으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이문구 선생의 ‘관촌수필’을 좋아했는데, 제가 가진 농촌의 정서가 소설이 될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장하면서 보고 느낀 모든 것은 문학 자산이 되어주었다. 소설집 ‘매향’ ‘국경을 넘는 일’ ‘늑대’, 장편소설 ‘여자 이발사’를 발표했고 신동엽문학상, 채만식문학상, 오영수문학상, 현대문학상, 이효석문학상을 받았다.

■사람 몸에 새겨진 이야기를 받다

두번의 자화상 전성태·2015·창비

2015년 낸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에는 작가생활 20년마다 자화상을 그려보리라 소망했던 마음이 담겼다. 2009년부터 문학계간지에 실은 작품 중 12편을 엮어 낸 책이다.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이야기를 들려드리다’에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바라보는 아들이 있다. 어린 아들을 위해 자신이 아는 모든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어머니에게 이제 아들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머니’는 어떤 존재인가 말해주는 대목은 뭉클하다. “어머니가 유일하게 반응하는 소리가 있었다. “엄마!” 하고 부르면 “오야”하고 대답했고 “밥 좀 줘”하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엄마와 밥은 마치 뇌에 저장된 기억이 아니라 가슴 같은 곳에 박히거나 뒤꿈치의 굳은살 같은, 기억과는 질적으로 다른 어떤 것 같았다.” 어딘가 먼 시간으로 떠나버린 듯하지만, 어머니는 이렇게 자식과 연결돼 있다.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를 듣고 자란 아들은 다시 그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려준다. 소설의 마지막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말해준다. “요양원 침대에 누운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해주느라고 나는 일찍이 어머니에게 들은 이야기들을 애써 떠올려야 했다. 어떤 미동도 없이 먼 세계에 있는 듯싶은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한순간 어머니 눈이 반짝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내 느낌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나는 어머니가 지금 열 살이 되었든 두 살이 되었든 내 얘기를 경청하리라 믿었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고 그 세계에 살고 있으니까.”

전성태는 등단 초기에 농촌 정서를 작품에 담았고, 세계화 과정을 관통하는 한국인을 이야기하는 작품을 거쳐 이제 일상의 층위로 왔다. “작가로서 자기 일상을 제대로 못 그려내면서 목소리만 컸던 것 같아요.” 소설집 ‘두번의 자화상’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이 바로 이야기라는 걸 깨닫게 된다. 주변을 찬찬히 돌아보는 소설가, 사람 몸에 새겨진 이야기를 받아내는 시선이 느껴진다. 소설을 읽었다기보다, 누군가를 만나 사는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다. 책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