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뒤늦게 배운 한글로 차곡차곡
- 이옥남 할머니 30년 일기장 속
- 가족얘기 이웃얘기 농사얘기 등
- 151편 엄선, 북펀딩으로 펴내
사계절을 아흔일곱 번 보낸, 강원도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책을 냈다. 날짜에 날씨까지 빠짐없이 기록한 영락없는 일기문이다.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가운데 151편을 골랐다. 알라딘서점에서 17일 동안 북펀딩을 했는데 568명의 독자가 힘을 보탰다. 그렇게 책이 세상에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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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옥남 할머니가 30년간 차곡차곡 쌓아온 일기를 책으로 펴냈다. 고된 농사일을 끝내고 저녁마다 눌러 쓴 할머니의 일기는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차 있다. 양철북 제공 |
‘4월 11일 맑음. 밭에서 김을 매는데 젊은 여자가 보건소에서 나왔다면서 치매 조사를 하고 갔다. 나 사는 동네 아냐고 해서 강원도 양양군 서면 송천리라 했더니 올해 무슨 년이냐고 물어서 2014년이라고 대답했다. 오래 살다보니 별일이 다 있다.’ 할머니는 아버지가 무서워서 어릴 때 글을 배우지 못했는데, 늦게 배운 글이 할머니의 적막한 삶에 큰 위안이다. 늦게라도 글을 안 배웠다면 수수떡같이 찰지고도 꾸밈없이 맑은 할머니의 글은 쓰이지 못했을 것이다.
‘오늘은 텔레비 위에 덮는 뜨게를 다 떠서 수동집 갖다 주고 저녁에 딸한테 욕만 실큿 먹고, 이런 인간은 왜 안 죽고 살아있는지 답답하기만 하다. 지 맘에는 날 생각해서 고생한다고 편하게 있으라고 하는데 우두카니 있으니 열 빠진 거 같은 기 심심해서 손으로 뭘 만져야 정신이 드니 뜨게라도 뜨는 건데 하도 쏘아붙이니 서운하기만 하다.’
딸이 속상해할 정도로 할머니는 일을 많이 한다. 아홉 살에 잡기 시작한 호미를 90년째 손에서 놓지 않는다. 일기에는 그래서 농사 얘기가 유독 많은데 그만큼이나 많은 게 자식 그리운 얘기다. 열일곱에 시집와서 집안은 나 몰라라 바람 나서 타지로 떠돈 남편은 없는 셈, 혼자 농사지어 자식들을 키워냈다. 타지 사는 자식들 먹이려고 일하고, 힘들게 사는 자식들한테 짐 안 되려고 일하고, 자식들이 보고 싶어서 일한다.
‘큰딸이 온다기에 줄려고 개울 건너가서 원추리를 되렸다. 칼로 되리는데 비둘기가 어찌나 슬피 우는지 괜히 내 마음이 처량해져서 눈시울이 뜨거워지네. 그래도 원추리나물을 뜯어가지고 집에 와서 점심 먹고 아래 밭에 가서 두엄을 폈다. 두엄을 펴면서 집을 바라보니 누가 집으로 들어가기에 큰딸이 온 것 같애서 얼른 일어서서 집으로 오는데 진짜 딸이 왔네. 정말 반가웠지. 그런데 금방 가니 꿈에 본 것 같구나.’
막내아들이 다녀간 어느 날의 일기는 단 두 줄로 끝난다. ‘중국 갔던 막내가 왔다가고 나 혼자 있다. 고요한 밤에 풀벌레 우는 소리만 쟁쟁하게 나는구나.’
할머니는 아흔일곱 해를 살았지만 무엇이든 들여다보고만 있으면 신기하다고 한다. 그 신기함을 그날 밤 글로 옮긴다. 같은 산이며 같은 밭, 같은 새, 벌레를 매일 보고 살아왔는데 새삼스러운 감상에 젖고, 새로운 그리움을 떠올리는 할머니는 천생 시인 같다. 잠 안 오는 밤 자식 생각에 연필을 들고 한 자 한 자 그리움을 적어내리는 할머니를 떠올리면, 각자의 엄마 생각에 눈시울이 젖을 것이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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