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단적 결정으로 정몽주 살해
- 왕자의 난 일으켜 동생 숙청 등
- 폭압적 군주의 이미지 덮어쓰고
- 왕권강화·국가 기틀 다진 덕에
- 아들 세종은 성군으로 자리매김

썩은 고려를 폐하고 새 나라를 세워 잘살아보자고 설득하는 이방원의 ‘하여가’에, 골백번 고쳐 죽어도 배신자는 될 수 없다고 답한 정몽주의 ‘단심가’. 한국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시조 두 편을 남긴 그 장렬한 만남을 끝으로, 이방원이 선죽교에서 정몽주의 목숨을 앗았다는 것은 조선건국사에서 가장 유명한 이야기다.

	고려 말의 대 성리학자이자 충신인 포은 정몽주(1337-1392)의 초상화. 조선 후기 궁중화가 이한철이 개성 숭양서원에 있던 초상을 옮겨 그렸다. ‘조선 건국 잔혹사’는 정몽주의 죽음에 얽힌 일화에 의문을 제기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대중 역사 저술가 배상열은 조선 건국 잔혹사에서 ‘이방원은 정몽주를 죽이지 않았다’고 단언하며 이 장면의 개연성을 부정한다. 정몽주는 한때 정도전 일파를 일거에 소탕할 기회를 잡는다. 이성계가 낙마해 심각한 부상을 입은 틈이었다. 이방원은 정몽주 살해를 꾀하지만, 이성계는 허락하지 않는다. “충효로 이름을 알린 우리 가문이 충신을 그리 죽일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이성계가 ‘대업’과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 포기할 의향을 보이자 이방원은 독단으로 정몽주를 살해한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저자는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이 기록들이 납득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하다고 말한다. 고작 26세에 변변한 힘도 없는 문신 이방원이 아버지를 거역하고 대신 정몽주를 척살하려 모의했다는 것, 정몽주의 머리에 철퇴를 내리쳤다는 조영규 등 이성계의 심복들이 겨우 이방원의 명을 따라 이성계의 뜻을 거슬렀다는 것, 불세출의 명장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지 못해서 오래 준비한 반역을 포기하려 했다는 것 등 따지고보면 모두 앞뒤가 안 맞는다. 정도전·남은·조준은 갇혀있었고, 이방원은 그럴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면 정몽주를 누가 죽였을까. 이성계를 빼놓고는 답이 안나온다.

그럼 역사는 왜 이방원을 정몽주 살해자로 기록했을까. 태종 이방원은 사관과 툭하면 논쟁을 벌일 정도로 기록에 민감했다. 사료를 은닉·제거했고, 정몽주 살해부터 자신이 동생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1차 왕자의 난까지 모든 ‘피의 역사’를 자신이 한 행위로 꾸몄다. 태종이 스스로 ‘피의 왕’으로 역사에 남은 것은, 공 없던 왕이 스스로 공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아버지 아닌 자신의 대에서 사실상 새 나라의 명분을 확립해 강력한 제왕으로 우뚝 서고, 국가의 틀을 다지려는 초강수였다. 동생을 죽인 왕이 되기를 자처했을 뿐 아니라 형을 무능한 군주로, 아버지를 정신병자로, 아들을 탕아로 몰았다. 모든 피를 이방원이 마시고 간 그 자리에서 그의 아들 이도는 성군이 됐다.

이 책은 조선 건국 전후를 기록한 ‘고려사’와 실록에서 승자에 의해 덧칠된 부분을 벗겨내려 애쓴다. 영화 ‘쌍화점’의 소재가 된 공민왕의 ‘자제위’ 역시 반대세력에 맞선 왕의 친위세력이었으나, 조선 건국을 정당화하는 과정에서 ‘공민왕의 남색 욕구를 채워주고 왕비들과 간음한 요망한 미소년 집단’으로 매도됐다고 해석한다.

TV 드라마에서 가슴 두근거리며 지켜봤던 장면이 ‘손가락 오그라들도록’ 윤색된 기록을 바탕으로 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김이 좀 빠지지만, 그렇게 덧칠을 벗겨낸 역사는 개연성이 너무 뚜렷해 건조하지만, 이런 작업은 사실 얼마나 필요한가. 당대의 사람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는 데도 권력자의 입맛에 맞도록 조작하는 게 역사니 말이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