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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의 TV…태래비 <11> 미스 함무라비 ‘화내면 찌질한 거임’

꼰대문화에 통쾌한 반격 날린 청년판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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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6-05 18:47:01
  •  |  본지 1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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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살 때부터 추간판탈출증을 앓았다. 꾸준한 재활치료로 몇 년에 걸쳐 낫긴 했지만 체중이 늘면 잠을 못 잘 정도로 아팠다가 체중을 줄이면 금세 통증이 사라졌다. 체중을 줄이는 몇 달 사이엔 통증을 줄여줄 진통제가 필요해 병원을 찾았다. 50대 남성 의사는 왜인지 짜증이 잔뜩 나 있었다. ‘약 처방만 원하신다고?’ ‘네.’ ‘일주일 치 드릴게.’ ‘혹시 9일 치를 주실 순 없을까요?’ ‘아플 때만 먹으라고.’ ‘24시간 아픈데요,’ ‘난 일주일치 이상은 못 줘.’ 그렇다. 이 의사는 계속 반말을 했다. 내가 조카도 동생도 아닌데 초면에 반말지거리나 찍찍 해대는 의사에게 나는 뭐라고 해야 했을까. 정중하게 항의해보았자 ‘그럴 수 도 있지’라거나 ‘아니 나는 반말을 한 게 아니고…’라는 헛소리를 할 것이다.

   
약 2초간 침묵을 지키며 진료대를 노려보던 나는, 평생 내가 꿈도 꾸지 못했던 문장을 ‘시건방지게’ 내뱉는 업적을 이루었다.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일주일 치 줘.’ 의사는 당황하며, 아니 왜 반말을 하세요… 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웃음을 터뜨리며 종지부를 찍고 진료실을 나왔다. ‘네가 먼저 하길래.’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내 인생에서 ‘어린 여성’에게 반말부터 던졌던 무례한 아재들이 차례로 스쳐 지나갔다. 소심하기 짝이 없는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었지. 비닐하우스의 한 떨기 딸기같이 어린 내게 이런 전투를 알려준 이는 누구였을까, 또는 무엇이었을까.

드라마가 교본이었다면 사람들은 믿을까. 현직 판사가 쓴 JTBC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사진)’는 내 전투 예습의 전술서였다. 예시와 대처법까지 자세히 나와 있는. 젊은 판사 박차오름과 임바른은 배석 판사다. 부장 판사 옆에 얌전히 앉는 ‘어린 판사’들이다. 싸울 일도 대들 일도 많지만 열정이 해가 되기도 하고 좌절하기도 한다. 변호사나 검사와 달리 누구 편을 들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공정하게 손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그러나 이 드라마에선 법정 안의 일만큼 법정 밖의 일도 골치 아프다. 회식자리에서도 배석 판사 방의 불이 꺼졌는지 안 꺼졌는지 확인하며 퇴근시간을 가지고 들들 볶는 판사도 있고, 엘리베이터 타는 순서도 기수를 따지는 기묘한 장유유서도 법원 안에선 왕왕 있다. 여성 판사 출근 복장이 너무 수수하다며 문제 삼기도 하고, 사석에서 ‘피해자의 치마 길이가 너무 짧았다’라며 힐난하는 판사도 있다. 꼰대들의 일장연설이 포함된 불필요한 회식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박차오름과 임바른은 제 나름의 방식으로 경직된 법원에 저항한다.
   
박차오름은 니캅(눈을 제외한 모든 신체를 가리는 이슬람의 여성 복장)을 입고 실언한 부장판사 앞에 나서고, 임바른은 회식에서 술을 진탕 마시고 ‘아저씨들은 가정도 없어? 재판 끝났으면 집에 가서 쉬지 무슨 회식이냐고!!’라며 주정을 부리곤 다음날 기억나지 않는 척한다. 미운 놈 튀는 놈한텐 화낼 수 있어도, ‘도라이’에게는 화내지 못하는 법. 법원을 휘젓고 다니는 두 ‘도라이’에게 나이 먹은 판사들은 화내는 대신, 상대하는 걸 부끄러워한다. 가정도 없냐고, 회식 좀 그만하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주정뱅이가 끌려나가고, 부장판사는 한마디 중얼거린다. 아, 쪽팔려…. 거기서 그쳐야 얼마 남지 않는 자존심이 버팅겨진다는 걸 그래도 그 꼰대는 안다. 것다 대고 화내면 찌질한 거니까. ‘미스 함무라비’는 판타지다. 세상 어느 판사도 이렇게 살 수 없다. 그러면 어떤가. 이 판타지가 나에게 가이드가 되지 않았는가. 판사에겐 못 대들어도, 난 의사한텐 대들었다. 아이 고소해. 다, 이 드라마 덕분이다.

작가·글쓰기 강사

※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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