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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의 TV…태래비 <10> EBS ‘빡치미’

대한민국 ‘을’들이여, 속 시원히 같이 빡쳐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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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8-05-22 18:56:32
  •  |  본지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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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빡(깊은 빡침). 미투 운동이 활발한 요즘 나를 지배하는 주 감정이다. 피해자들의 폭로에 터무니없는 백래쉬(반발)를 퍼붓는 일부의 행태를 보고 있으면 ‘이따위 세상 다 망해라’라는 저주가 솟구친다. 5분 전까지만 해도 후쿠오카로 가는 초저가 항공권을 쟁취하고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던 나는 성폭력 피해자가 울면서 쓴 폭로 글에 ‘이미 지난 일인데 가해자의 생계도 생각해줘야 한다’라는 덧글을 단 누군가에게 족저근막염이나 걸리라며 혼자 빡친다.
   
EBS ‘빡치미’에 출연해 대기업의 갑질 관행을 비판한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 사진 출처 EBS
불편함은 상상력의 원동력이라고, ‘동치미’ 대신 ‘빡치미’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게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면서였던가. 발코니에서 빌라의 넓은 주차공간을 내려다보자, 정관읍으로 이사 오기 전 용호동에서 겪었던 주차전쟁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일 것이다. ‘빡치미’라는 EBS 프로그램이 있을 줄은 정말 몰랐다. 침대에 누워 텔레비전 채널을 하릴없이 돌리다가 화면 왼쪽 위에 ‘빡치미’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프로그램이 방영되고 있는 걸 보고 사레가 들렸다.

나는 쿠퀠퀠룩 내장을 쏟아내며 볼륨을 높였다. 김구라, 황제성, 표창원이 화면 가득 충만한 쓰리쿠션으로 펼쳐졌다. 하필이면 그 회 방송 내용도 ‘주차전쟁’에 관한 거였다. 이 정도면 운명이니 나는 빡치미와 결혼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헬조선에서 전 국민의 빡침을 공유하는’ 이 프로그램은 무려, EBS의 방송이다. 기껏해야 자연에 더불어 사는 가족 사이의 갈등을 그린 다큐나 방송할 것 같은 이 EBS는 요즘 신선하고 진중한 프로그램들을 속속 만들고 있다.

‘다문화 고부열전’, ‘대도서관 JOB쇼’처럼 들뜨지 않고도 재미있는 언어를 발산하는 시리즈의 본격적인 시작이랄까, ‘빡치미’는 그렇게 나에게 왔다. 1회부터 대기업 갑질을 소재로 하며 대한항공 박창진 사무장을 게스트로 초대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무고한 을의 대명사가 멀쩡한 모습으로 텔레비전에 출연할 수 있는 세상이 오다니, 이 얼마나 당연한데 당연하지 않은 형용모순인가. 피해 보상은커녕 3억 원의 빚만 남은 남양유업 대리점 주의 현재진행형 고통을 보여주고, 참여연대 시민위원장이 나와 일이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지 일목요연하게 설명도 해준다. 운전기사에게 룸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보지 말고 운전할 것을 강요하고, 늦을 때마다 몇 대씩 때리는 회장님들도 폭로한다.

내친김에 갑질 회장님의 운전기사 체험도 한다. 반말에 막말에 욕설을 숨 쉬듯 날리는 회장님의 잘 배워 먹으신 언행은 빡침의 고도계를 폭파시킨다. 마카다미아 일가의 돌고래 초음파 녹취 파일은 말할 것도 없이 함께 달려 나오고, 표창원 의원은 ‘대국민 사과 → 사회봉사 → 피해자 갈라치기’가 대기업의 전형적인 갑질 마무리 코스라고 정리한다.

속지 말 것,

돈과 권력을 어찌 쓸 줄 모르는 자들을 믿지 말 것.
속이 시원하다.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을’을 호구로 만드나. 이 프로그램은 대한민국에서 ‘을’로 살아남기 위한 생존 전략 안내 프로다. 그럼에도 웃음이 끊이지 않는 것은 전작 ‘보니하니’를 연출한 PD 덕분일 것이다. 차츰 나아지곤 있지만 대한민국에서 살다 보면, 아, 여기가 죄짓고 오는 지옥이구나 싶다. 그러나 지옥에도 재미는 있다. 같이 빡쳐 주는 재미랄까. 삶을 더 낫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어떤 투쟁도 불사할 필요가 있다.

   
아직 불평등과 차별이 만연한 이 사회. 그러나 채널만 돌려보자. 동지들이 여기 있다.

작가·글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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