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탄광 광부로 간 한민족 수만 명
- 2차대전 日 패망후에도 남겨져
- 옛 기밀·공식·외교문서 등 연구
- ‘소련이 강제로 억류’ 통설 반박
- 우리 정부 귀환노력 부재 꼬집어

우리 자신이 ‘사할린 한인(韓人)’이라고 상상해 보자. 조선이 망해버리고 일제강점기가 시작됐다. 한민족은 ‘나라 잃은’ ‘나라도 없는’ 백성이 됐다. 일제 식민당국은 조선인 수만 명을 러시아 사할린(당시는 일본이 지배하던 도요하라)의 탄광에 광부로 배치한다. 그 숫자는 4만5000여 명이라고도 했고 2만3000여 명이라고도 했다.

	사할린 남쪽 코르사코프 항구의 ‘망향의 언덕’에 서 있는 ‘망향의 탑’. 일제 패망 뒤에도 고향 한반도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 항구에서 발이 묶였던 한민족을 위로하기 위해 한국의 사회·문화단체가 세웠다. 국제신문 DB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라 전시의 탄광에서 죽을 고생을 하며 노동하던 중에 일본이 패망했다. 사할린에는 소련군이 들어왔다. 패전국이 된 일본은 사할린의 일본인 약 30만 명을 일본으로 귀환시킨다. 그런데 4만5000 명이라고도 했고 2만3000명이라고도 했던 조선인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다. 조선인들은 조선인다운 기개로 탈출도 하고 집단행동도 하고 스탈린에게 편지도 써가며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대부분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사할린에 남아야 했다.

나라 없는 설움 탓에 사할린에 살게 된 동포들은 한동안 소련의 인민으로 살았고, 이어 북한 국적을 취득하거나 무국적자로서 남았으며, 이어 대한민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는 등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냈고 살아남았다.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 사할린 동포 귀국 사업이 크게 진전돼 많은 사할린 동포가 한국으로 영주 귀국하면서 이 문제는 풀렸다고 여기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에는 있다. 책임과 변명의 인질극은 이런 시점에 다시금 문제를 제기한다. 진지하고 엄밀하게. 이연식 박사 등 저자들의 주제의식을 집약한 프롤로그를 인용한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학문적으로 검증도 되지 않은 선험적 테제들이 난무하고 있다. 가령 영주귀국으로 인해 사할린한인 문제는 이제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는 인식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심지어 정부 당국도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가 과연 이 문제를 얼마나 진지하게 다뤄왔는지에 대한 깊은 성찰도 없이 현실정치나 외교 논리를 앞세워 납득할 수 없는 정책들을 양산하고 있다. 그럴 때마다 총체적인 ‘국가전략과 철학의 부재’를 느끼곤 한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 틈을 비집고 온·오프라인에 걸쳐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현 단계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압축한 진단이다. 이 책은 ‘한국 최초로’ 옛 소련을 중심으로 그때 기밀문서, 공식문서, 외교문서 등 ‘원자료’를 직접 연구한 결과물이라 매우 뜻깊고 가치 있다. 이 부문 연구 수준을 높였다.

이 책을 살피면, 소련 당국이 당시 사할린 한민족을 2만3000여 명으로 집계했음이 명확하게 나온다. 그리고 소련 당국이 사할린 동포의 한반도 귀환 여부를 놓고 이견을 주고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당시 사할린의 관료 골리코프는 외무장관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이것(사할린 한인을 귀환시키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2만3000명의 한인을 노동력으로 붙잡고 있다고 한들 그것이 우리에게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니고….”(110쪽) 이는 소련이 노동력 부족을 걱정해 한인을 강제로 붙잡아 둔 것이라는 기존 통설을 소련 쪽 자료로 반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할린 동포 문제를 다시금 보게 해주는 뜻깊은 책이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