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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리의 TV…태래비 <1> 미안해요! ‘통장요정’ 김생민

분명 내가 쓴 돈 ‘스튜핏’인데, 마음은 왜 편한거죠

  • 국제신문
  • 디지털콘텐츠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18-01-09 19:04:59
  •  |  본지 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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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수증 속 모순된 소비 지적에
- ‘텅장’ 뿐인 나 자신 돌아봤지만
- 소소한 즐거움 포기 쉽지않네

지갑에서 나가는 천원 이천 원을 아껴 썼더라면, 하고 후회해 본 적 없었다. 박복한 살림살이를 하는 중에도 아트마켓에서 매대를 휩쓰는 짓을 서슴지 않았고 읽지도 않을 책을 대형서점 굿스 때문에 몇십 권씩 사서 쟁이는 것도 예사였다.
   
KBS2 ‘김생민의 영수증’에서 김생민이 의뢰인에게 “스튜핏!” 진단을 내리고 있다.
좁은 집에 빽빽이 들어찬 ‘예쁜 쓰레기’들은 연말마다 공짜로 새 주인을 찾아 떠났다. 사들이고 버리는 일이 일상이었다. 덕분에 통장은 늘 ‘텅장’이었다. 이런 인생을 죄책감도 없이 살아온 내가 ‘김생민의 영수증’이란 tv프로그램을 만난 것은 계시와도 같았다. 너, 계속 그렇게 살면 나중에 하기 싫은 일을 하게 된다, 라는 무시무시한 첫 방송의 메시지와 함께. 저축이라. 나를 제외한 전 지구인이 다 할 것 같은 저 간단한 두 글자를 왜 나는 생각도 않고 살아왔을까.

모든 건 조악하기 짝이 없는 내 경제관념 때문이다. 30대 공무원, 신혼의 아내, 프리랜서, 60대 주부, 연예인까지 통장요정이라 불리는 김생민에게 가계부를 맡겼다. 김생민은 그들의 지출 내역서를 꼼꼼히 분석하며 ‘스튜핏’, 심하면 ‘그레이트 스튜핏’을 외쳤다. 다이어트 한약을 30만 원어치 사고 8시간 후 삼계탕을 먹은 자에겐 스튜핏, VOD 다시보기 정액제를 지출한 항목에 다시 스튜핏, 대출금 몇 천만 원을 등에 지고 피부관리제품을 24개월 할부로 끊은 자에게 그레이트 스튜핏, 이라 외치는 그의 어조는 방송 내내 단호했다.

‘김생민의 영수증’은 진작 장안의 화제였다. 삶의 퀄리티를 높이기 위해 소비를 반복해야 하는 나날과 사람답게 살수 없는 임금 탓에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삶 사이에 지도를 상세히 그려주는 방송. 더군다나 지출 내역을 꼼꼼히 지적하며 적절치 못한 소비를 하는 대신 무엇을 해야 할지 알려주기까지 하지 않는가. 밤 11시40분과 아침 7시에 충동 인터넷 쇼핑을 하는 의뢰자에게 김생민은 ‘11시 이전에 취침하고 오전 8시에 일어나라’라는 처방을 해주었다. 남편 데리러 갔다가 갑자기 비를 만나 우산을 샀다는 의뢰자에겐 ‘남편 재킷을 덮어쓰고 빗속을 뛰며 드라마 찍는 기분을 만끽하라’라는 처방을, 집에서 입을 냉장고바지를 산 독신의 의뢰자에겐 ‘냉장고 바지가 아무리 얇아도 안 입는 것보단 두껍다’라는 처방을 내렸다.

나는 판단력이 흐려지는 심야에 저질렀던 모든 인터넷 쇼핑과 비 올 때마다 산 우산과 비가 오지 않아도 예쁘다는 이유만으로 산 우산과 깔별로 장만한 냉장고바지 5벌에 대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는 슈퍼 그레이트 스튜핏이었다. 냉장고바지를 입는 대신 그 돈으로 친구에게 밥 한 끼를 더 샀더라면 우정은 깊어졌을 것이고, 11시 전 잠자리에 들며 컴퓨터를 껐더라면 숙면도 하고 소비도 막았을 것이다. 우산을 7개나 사는 대신 티셔츠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쓰고 빗속을 달렸더라면 슬쩍 우산을 씌워주는 잘생긴 인연 하나 생겼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비로 삶의 비용을 지불하는 대신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선택지 가운데, 나는 텅 빈 통장을 쥐고 서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문득, 아트마켓에서 수공예 인형을 사서 책상에 놓았을 때의 푸근한 마음과, 김영하 소설가의 소설 한 대목이 인쇄된 서점 사은품 유리컵으로 매일 물을 마시는 기쁨과, 충동 구매한 수십 개 피규어를 창가에 두고 즐거워하는 일상이 더 큰 파도가 되어 나를 덮쳤다. 그래서 김생민의 단호한 목소리는 점점 멀어져갔다. 최소한의 양심으로 하루에 만 원씩 넣는 적금을 신청하며 나는 마음속으로 말했다. 미안해요 통장요정님. 그래도 이게 어딥니까.

작가·글쓰기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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