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민없이 사용하는 단어나 낱말
- 정반대의 의미 숨어있는 경우도
- ‘포퓰리즘’ 부정적인 느낌주지만
- 역사적으로 긍정적 개념도 있어

이 책에서 가장 ‘소박해’ 보이는 문장을 먼저 소개해 본다. 꽤 긴 문장인데, 뜻을 최대한 살리려니 줄이기 어렵다.

아이들에게 우유를 충분히 공급하는 시책을 편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어린이를 끌어안고 있다. 포퓰리즘은 ‘서민주의’로 번역할 때 그 말이 담은 뜻을 훨씬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다. 궁리 제공

“‘뿌리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만든 고 한창기 선생이 70년대 중반 전라도 벌교의 장터에서 만난 농부들은 ‘곡식을 팔러’ 장에 가는 게 아니라 ‘돈을 사러’ 장에 나온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벼농사도 짓고 콩하고 옥수수하고 감자도 심고 닭도 치고, 내 식구 입에 들어가는 것은 어찌어찌 내 땅에서 내 손으로 키워낸 것으로 댈 수 있었겠지요. 그래도 옷은 사야 하고 아이들 등록금도 내야 하고 아프면 병원에도 가야 하니 ‘돈’이 없어서는 곤란했겠지요. 하지만 ‘돈을 사러’ 장에 온다고 말하는 농부의 가슴에서 돈은 갑이 아니라 을입니다. 반면에 ‘돈을 벌러’ 꼭두새벽부터 밤늦도록 도시에서 중노동에 시달리는 젊은이에게 돈은 갑 중의 갑입니다.”(157쪽 ‘평생직장’ 편)

현재 영국의 런던대 아시아아프리카대학(SOAS)에서 영한 번역을 가르치는 이희재 씨가 쓴 번역전쟁의 핵심 원리를 위 인용문에서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저자 이희재

이 책에는 세계사부터 한국 사회, 현재의 국제 정세까지 주름잡는 숱한 용어와 개념이 가득하다. 목차를 살피면 이렇다. ‘제1부 우리가 빠져 있는 오역의 덫’에는 다원주의, 포퓰리즘, 진보, 극우, 음모론, 민영화, 인턴 등이 한 꼭지씩 차지한다. ‘제2부 말을 점령한 돈과 싸운다’에서 저자는 중국, 힐러리, 카다피, 만델라, 미스 마플, 하토야마, 무가베 등을 자기 관점에서 해설한다. ‘제3부 말과 앎 사이의 무한한 가짜 회로를 벗어나다’에는 중립, 마약전쟁, 테러전쟁, 프랑스혁명, 비정부기구 등이 주요한 항목으로 배치됐다.

첫머리에 소개한 ‘돈을 사다/곡식을 팔다’의 차이를 이 책에 실린 개념 및 낱말과 연결하면, 저자의 기획의도가 드러난다. 책은 우리가 시사 토론 등에서 흔히 접하고 자주 쓰기도 하는 많은 개념(주로 외국어를 우리말로 번역한 낱말)의 속내를 뜯어보면, 실제로는 완연히 다른 뜻 또는 기존 관념과 모순되는 내용을 뜻할 때가 많다는 점을 ‘폭로’한다.

‘포퓰리즘’을 보자. 이 낱말은 오로지 나쁜 뜻으로 쓰인다. 인기를 얻기 위해 현실성 없는 공약이나 정책을 남발한다는 뜻이다. 그러면서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같은, 서방 주류 사회가 ‘국제 또라이’로 취급하는 인물을 낮잡아 표현할 때 동원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인식은 ‘절반만 맞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그는 포퓰리즘을 ‘서민주의’로 번역하고, 이 낱말에 담긴 역사적·긍정적 측면을 설명한다. 이 책 제목이 ‘번역전쟁’인 이유가 이처럼 어떤 관점에서, 낱말과 개념을 얼마나 깊이 들여다보는가에 따라 우리 생각과 세계관이 달라짐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역사와 현실의 맥락에서 영어 privatization은 ‘민영화’가 아닌 ‘사유화’이며 ‘음모론’의 경우 ‘음모’ 자체로 옮기는 것이 알맞은 경우가 많다는 등의 논지를 전개하면서 기존의 세계질서를 독하게 비판한다.

조봉권 기자 bgjoe@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