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관리견·문지기 돼지·억척 암탉…
- 인간과 닮은 동물 캐릭터들
- 모성애·가족사랑 닮은 우화
- 프랑스 만화가 뱅자맹 레네작

세 병아리의 엄마인 여우가 있다. 그렇다. 닭이 아니라 여우.
여우는 여우인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약해빠진 데다 존재감도 없어서 아무런 위화감 없이 동물 농장을 드나드는 여우다. 그래도 타고나기는 육식동물이라 닭고기는 정말 한 번 먹어보고 싶다. 육류라곤 먹어본 적 없어서 맛도 모르지만. 농장의 닭을 찾아가 “한번만 맛보게 해달라”고 빌다가 콧방귀 뀌는 암탉의 엉덩이를 꽉 깨물어 뭇매를 맞고 쫓겨나는 게 이 여우의 일상이다. 그런 날이면 숲속 동굴로 돌아가 순무를 으적으적 씹으며 허전함을 달랜다.

‘진짜 맹수’인 늑대는 농장을 쉽게 드나드는 얼간이 여우를 이용해 포식하려는 꿈을 꾼다. 여우가 닭을 잡아 오진 못하지만 달걀은 훔쳐올 수 있을 테니, 달걀을 부화시켜서 병아리가 나오면 조금 키워 잡아먹겠다는 계획이다. 일이 거짓말처럼 순조롭게 풀려서 여우는 달걀을 훔치고 알을 품어 부화(!)하는 데까지 성공한다. 그런데 상상도 못 했던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알에서 깬 병아리 세 마리가 여우를 엄마로 ‘각인’한 것이다.

‘어네스트와 셀레스틴’으로 명성을 얻은 프랑스 만화가 뱅자맹 레네가 빅 배드 폭스로 다시 한번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세계적인 만화 축제 앙굴렘페스티벌에서 야수상을 받은 이 작품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 올해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 개막작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깨물어주고 싶게 귀여운 동물 캐릭터들은 사실 유형별 인간의 ‘스테레오 타입’을 연기한다. 여우의 출입을 방관하는 농장 관리견과 문지기 돼지는 ‘좋은 게 좋다’며 하루하루 보내는 나태한 관료를 닮았다. 농장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하는 개에게 맹렬하게 항의하고 ‘자경단’을 구성하는 암탉들을 보면 자식을 위해 세상없이 용감해지는 엄마가 떠오른다.

이런 스테레오 타입이 카타르시스와 유머를 담당한다면, 가슴을 찡하게 하는 대목도 있으니 바로 ‘모성애’에 관한 관찰이다. 마음 약하고 정 많은 여우가 병아리를 키우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웃음이 나다가도 마음 한구석이 뻐근하다. 여우는 밤새 삐약거리며 우는 병아리가 “시끄럽다”는 핑계를 대며 꼬리로 따뜻하게 감싸서 재운다. 병아리가 밥을 못 먹으면 “살이 안 쪄서 잡아먹지도 못할 거니까” 지렁이 먹는 법도 가르치고, 무서운 여우인 척하려고 으르렁대다가 병아리과 ‘맹수 놀이’에 빠져든다. 독자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여우가 끝내 세 마리의 병아리와 사랑에 빠질 거라는 것을.

작가가 밝힌 작화 모티브는 이렇다. “어린 시절, 병아리들이 첫 번째로 보는 사람을 엄마로 여긴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나를 거의 충격에 빠뜨렸다. 나는 정말로 그것을 실현해보고 싶은 마음과 아이를 갖기엔 너무 무책임하다는 현실적 두려움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숭고한 모성(부성)이 실은 공포라는 통과의례를 전제로 하는 것임을 작가는 ‘병아리의 진실’에서 감지한 것일까.

물론 이 만화책의 매력은 그런 류의 사색이 아니다. 흐트러진 밑그림에 수채화 같은 채색, 익살맞고 귀여운 동물 캐릭터 그리고 시종일관 입을 헤벌리고 웃게 하는 촉촉한 힐링, 바로 그것이다.

신귀영 기자 kys@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