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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재휘의 시네필] 잃고 나서야 그의 소중함을 알다

배우 고 김주혁을 회고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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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입력 : 2017-11-09 18:55:17
  •  |  본지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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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과 ‘비밀은 없다’(2015), ‘공조’(2016)와 같은 최근의 필모그래피에서 연기 변신을 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배우 김주혁(1972~2017)의 이미지는 여전히 ‘싱글즈’(2003)와 ‘홍반장’(2004), ‘청연’(2005)과 ‘방자전’(2010) 등으로 익히 보아온 수줍어하는 남자의 인상으로 남아있다. 매너와 품격이 몸에 배어있고, 먼저 앞으로 나서기보다는 헌신적인 조력자의 위치로 남고자 한 발 물러나 주인공에게 양보할 줄을 알았던 사내의 모습. 따뜻한 웃음을 지으며 줄곧 그런 인물을 도맡아 자신만의 성격으로 소화해왔던 그가 지난 10월 30일,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이 글은 한 배우가 남긴 흔적을 되짚는 회고이자 추모이다.
   
배우 김주혁(왼쪽)이 장진영과 함께 주연한 영화 ‘청연’(2005).
한국영화의 일반적인 경향 속에서 김주혁의 존재는 굉장히 예외적인 것이다. 배우로서 김주혁이 지닌 특별함은 한국영화 안에서 남성 연기자가 어떠한 방식으로 소모되어왔는가를 관찰하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괴물’(2006)과 ‘국제시장’(2014)처럼 가족-공동체의 명운을 짊어진 가부장이거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에서 ‘범죄도시’(2017)로 이어지는 범죄 느와르의 우악스러운 강력반 형사, ‘추격자’(2008)와 ‘악마를 보았다’(2010)의 싸이코패스 범죄자, ‘범죄와의 전쟁’(2012)과 ‘내부자들’(2014)의 협잡꾼이었던 적이 없다. ‘세이예스’(2001)와 ‘YMCA 야구단’(2002)으로 주목받은 이래,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온 중견 배우의 경력이 이러한 인물 전형을 비껴가 있다는 건 실로 기이한 경우가 아닐 수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주혁의 개성은 일상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보통 남자의 선량함을 연기했다는 데에 있었다. ‘싱글즈’의 증권사 직원 수헌과 ‘청연’의 한지혁은 사랑하는 이의 선택을 존중할 줄 아는 현대의 신사였으며, 일당 벌어 먹고살면서 동네의 온갖 일을 도맡던 ‘홍반장’의 홍두식은 주변에 한 사람쯤 있어주었음직한 정다운 동네 이웃이었다.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짝사랑으로 일관한 소심한 청년의 순애보는 ‘방자전’에서 유교적 도덕과 남성상, 신분제를 거스르는 방자의 연애담을 거쳐 ‘커플즈’(2011)의 카페 주인 유석으로 고스란히 이어지며, ‘아내가 결혼했다’(2008)의 덕훈은 뜻대로 되지 않는 아내와의 관계에 당혹스러워하지만, 그녀를 이해하는 동시에 자신의 과오 또한 돌아보고 반성할 줄 아는 인물로 그려진다.
전근대적 성역할의 관념에 머물러있던 한국영화의 남성상에서 김주혁은 모더니즘의 한 가능성을 보여준 배우였다. 이성을 동등한 입장에서 존중하며, 관계 속에서 절제를 알고, 든든히 뒷받침해주는 계몽된 현대 남성이었으며, 자기 존재감을 과시하기보다는 담담히 일상을 살아가는 보통 사람의 인상으로 남기를 자처했다.

   
그랬던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든든히 서 있던 기둥이 하나 사라져버린 듯한 공허감. 작금의 한국영화가 극단적인 사회상의 소재, 남성 중심의 서사 일변도로 퇴행하는 가운데, 단지 배우 한 사람을 잃은 것이 아니라 하나의 캐릭터를, 한 시대를 잃어버린 건지도 모른다는 우수에 젖게 된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측백나무의 시들지 않음을 안다(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던 ‘논어’의 글귀처럼, 김주혁을 잃고 나서야 그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후회가 밀려오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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