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북촌 반지하에서 시인은 10년을 살았다
- 목에 꽉 찬 미세먼지가 인내의 고름덩이가 돼도
-‘사랑 밥’ 한그릇 훌훌 끓여 당신과 나누고픈 절실한 연대
- 시인은 단호히 말한다
- 현실을 모르면 시가 아니다

아프다. 하지만 따뜻하다.

신현림의 신작 시집 ‘반지하 앨리스’를 읽으면서 든 생각이다. 많이 아프면서, 힘들면서 쓴 시들이다. 힘든 시간을 혼자 견디고, 힘든 사람들 속에서 견디고, 그들과 연대하고, 현실과 역사를 인식하는 시인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 시선이 현실을 버티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토끼굴로 내려가 환상적인 세계를 통해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고, 신현림의 앨리스는 반지하로 내려가 세상과 자신을 보았다. 그가 견뎌낸 시간, 바라본 세상이 궁금했다. 시집 발간에 맞춰 그가 사진전을 열고 있는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의 류가헌 갤러리를 찾아간 것은 지난달 초다. 사진전 제목도 ‘반지하 앨리스’였다.

■사람이 머무는 공간, 집

신현림은 1961년 경기도 의왕시에서 태어났다.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지루한 세상에 불타는 구두를 던져라’ ‘세기말 블루스’ ‘해질녘에 아픈 사람’ ‘침대를 타고 달렸어’ 그리고 8년 만에 발표한 ‘반지하 앨리스’까지 5권의 시집을 냈다. ‘신현림의 미술관에서 읽은 시’ 등 에세이집도 여럿 냈다. 사진가로도 활동하는 그는 2012년 울산 국제사진 페스티벌 한국 대표 작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의 ‘작업’에는 그림, 사진, 시가 함께한다. 그는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였다. 미대를 가고 싶었지만 어머니가 반대했다는 이야기, 아주대 국문과를 졸업하고 상명대 예술디자인대학원에서 비주얼아트 석사 학위를 받았다는 이력을 듣고 나니 그의 작품 세계가 한결 가까이 다가온다. 그는 그 시간을 이렇게 표현했다. “제 첫사랑은 그림, 결혼 대상은 시였어요.”

	반지하 앨리스 /신현림 /민음사 /2017

류가헌 갤러리에 들어서 신현림의 사진을 먼저 만났다. 첫 전시 ‘아我! 인생찬란 유구무언’(2004)을 시작으로 ‘사과밭 사진관’(2011) 등에서 그는 특유의 상상력으로 평범한 일상을 낯설게 바라보는 작업을 해왔다. 사진전 ‘반지하 앨리스’는 사람이 머물렀던 공간, 집에 주목한다. 한때는 뜨겁고 충실한 삶이 흘렀을 집과 도시들이 어떻게 폐허에 이르렀는지 생각하게 하는 사진들이다.

‘반지하 앨리스’라는 제목에서 ‘반지하’에 눈길을 준 사람은 얼마나 많을까. 시인은 서울 안국동, 경복궁의 북쪽인 북촌의 반지하 방에서 10여 년을 살았다. “종일 있어도 아침저녁 구분이 안 되는 곳에 있다가 바깥에 나가면 너무 밝아 충격적이었습니다. 밖이 환하니 안이 어둡더군요.”

그 날들을 시 ‘광합성 없는 나날’에서 짐작해보자. “하루 햇빛 한 시간도 안 되는/끔찍한 반지하 인생/끔찍함마저 끌어안아야 어른이지/울지 않아야 어른인 거지//목에 꽉 찬 미세 먼지/어른이라 폼 잡는/인내의 고름 덩이/공장 굴뚝 같은 핏줄에/가득한 슬픈 연기 덩이”라는 구절에서 반지하에 사는 이 시대 서민의 삶이 떠올랐다.

또 다른 시 ‘사랑 밥을 끓이며’는 가난을 버텨내며 반지하에서 현실을 살아내고 있는 많은 앨리스들을 대신해서 말해준다. “내 눈물은 빚더미 속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내 발은 사막을 건너는 법을 익히고/내 길은 무엇을 잘못했나 살핀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시는 “꿈의 아궁이에 해를 넣고/사랑 밥을 끓이고 싶다//내 마지막 사랑과 밥/당신들에게 다 나누어 주겠다”고 끝난다. ‘당신들’과 함께 시인이 끓인 ‘사랑 밥’ 한 그릇 먹고 싶다. 그러고 나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힘이 날 것 같다.

■현실의 인식이 쓰게 하는 詩

시집에는 고향 의왕과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시도 있다. “나이 들면서 고향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어릴 적 기억, 엄마에 대한 기억들…. 그리움이죠.” 그는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을 지독하게 앓고 있다. “어머니를 애도하면서 ‘아, 진짜 죽는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죽음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몸으로 받아들인 거죠. 나도, 우리도, 모두가 역사 속으로 흘러간다는 것을요.” 그는 세월과 역사 안에서 가장 중요한 건 무엇일까를 생각했고, ‘사람으로 산다는 것’을 뼈아프게 인식했다. “대학 졸업 때 시인 김수영에 관한 논문을 썼죠. 같은 맥락이에요. 사회적인 인식 없이 어떻게 예술을 할 수 있겠어요. 고뇌가 없이는 할 수 없는 것이 예술이고, 현실을 외면하는 시는 시가 아니죠. 시인은 이 시대의 현실을 명확하고 치열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힘을 키우는 사람이 예술가입니다.”

반지하 앨리스라는 이름의 수많은 사람은 이 시집에서 세월호 아이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손을 맞잡고, 광장에서 촛불을 켜고, 가난과 슬픔을 견디고, 햇살을 그리워하며 희망을 놓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시집은 아프고, 따뜻하다.

시인은 반지하 방에서도 내몰려 지난 7월 북촌에서 서촌으로 급히 이사했다. 전화위복이랄지, 이번에는 햇살을 맘껏 누릴 수 있는 3층이다. 지상에서 올라온 앨리스가 보게 될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어쩌면 더 아프고, 그래서 더 따뜻할지도 모르겠다.

책 칼럼니스트

이 기사는 부산시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아 취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