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다니요? 우린 원칙에 따라 풀어요. 어떤 경우엔 충돌도 필요하지만요."

	영화 '원더 우먼'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원더 우먼'(2017)에서 다이애나가 동료 스티브 트레버의 비서와 대화하는 장면은 은연중에 중요한 모티브를 암시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10년대 영국은 서프러제트(Suffragette) 운동의 영향이 남아 있던 시기였다. 1912년을 기점으로 일어난 서프러제트 운동은 여성 운동가 1000여 명이 투옥되고 얻어맞는 등 갖은 진통을 겪은 끝에 마침내 투표권을 쟁취해낸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 사례로 꼽힌다. 이런 역사의 한가운데에 여권 신장의 상징인 여전사 원더 우먼이 서 있다는 건 다분히 의미심장한 연출이다.

	영화 '서프러제트'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사라 가브론의 영화 '서프러제트'(2015)는 여권 신장 운동이 싹트던 초창기 근현대사의 풍경을 상세히 다룬다. 세탁공장 노동자로 생계를 꾸리던 모드 와츠는 서프러제트 활동가의 모습을 접하며 차츰 여성으로서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권리에 의구심을 품게 된다. 영화는 한 가정의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역할에 충실하고 사회적 규범을 준수하며 사는 평범한 여성이 투쟁의 대열에 서서 동료들과 연대하고 많은 것을 희생하며 다른 여성의 삶과 미래를 위해 싸우는 운동가로 거듭나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쉬움도 남긴다.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편견은 강고히 남아있었으며, 초창기 여성운동은 백인 여성 중심이라는 인종주의적 한계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히든 피겨스'의 한 장면. 영화사 제공

그런 점에서 '히든 피겨스'(2016)는 '서프러제트'의 연장 선상으로 볼 수 있는 영화다. 1962년 우주 경쟁이 한창이던 NASA에서 수학자, 엔지니어, 사무원으로 일하던 세 흑인 여성의 실화를 따라가며 영화는 일상 곳곳에 관습이 되고 제도로 뿌리박힌 차별의 흔적을 비춘다. 특히 백인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 없고 회의에 참석할 자격을 제한받는 등 흑인 여성으로 겪는 인종 차별과 가정이 아닌 바깥에서 사회 활동을 하는 여성을 바라보는 가부장적 편견이 포개어진다.

일과 개인사 양면에서 이중의 차별을 겪는 주인공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능력을 입증하며 흑인, 그리고 여성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편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인가를 몸소 증명한다. 인종과 성차가 문제가 아니다. 사람을 구분하고, 분할하고, 차별하는 구조가 문제인 것이다. NASA 국장이 직접 백인 여성 전용 화장실의 간판을 부수는 장면은 가장 일상적인 장소에서 이뤄지는 시대 변화를 실감하는 순간일 것이다.

'서프러제트'와 '히든 피겨스' 그리고 '원더 우먼'은 페미니즘의 범주 안에 묶을 수 있는 대중영화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성차별에 반대하며 상호 평등한 사회적 관계를 지향하는 페미니즘의 화두가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문화적 징후이기 때문이다. 정치적 권리부터 실질적 평등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운동의 역사는 100년을 넘어가며 여성만이 아닌 인종 문제, 소수자의 인권과 반전(反戰), 환경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 방면에 걸쳐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이러한 역사의 축적이 바탕이 되어 지금 여성 영웅의 서사가 일대 유행을 일으키고 있다. 한 시대의 문화는 한 시대의 참 얼굴을 반영한다. 더욱 평등하고 자유로운 세계를 향해 인류는 한 발짝씩 나아가고 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