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진남북조부터 청나라까지
- 청만소사도 등 30선 매력 소개
- '동양화=산수화=여백' 공식 깬 청명상하도, 구구임옥도
- 퇴마사와 귀신행렬 중산출유도
- 서양 근대문명 극복 부옥산거도

"그림 보는 법이요? 천천히 음미하세요. 오래 봐야 합니다. 오래 보면 그 속에 있는 디테일이 나를 만나기 위해 나타나는 순간이 있습니다. 미술사학자 다니엘 아라스는 이 순간을 '그림이 일어선다'고 표현했어요. '꼭 한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로고폴리스 펴냄)은 단순히 그림 감상을 쓴 책이 아니라 그림이 일어설 때까지 그림 속에서 헤맨 흔적입니다."

	울분과 익살을 가로지르는 귀신들의 카니발, 공개의 '중산출유도'.

시인이자 미학자, 고등학교 선생님인 이성희 씨가 최근 '꼭 한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중국 회화 명품 30선'을 출간했다. 위진남북조 시대부터 청나라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중국 명화 30점을 소개하는 책이다. 2015년 국제신문에 연재한 '미학자 이성희의 이미지 모험' 38편 중 동양화를 발췌하고 10편을 추가로 집필해 엮었다.

이 책은 독자를 동양화의 매력에 푹 빠지게 유도할 입문서이자 대중서이다. 고개지의 '낙신부도', 범관의 '계산행려도',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장택단의 '청명상하도', 제백석의 '철괴이' 등 심사숙고해 고른 30점은 예술적 완성도가 높고, 작가와 작품을 둘러싼 이야깃거리가 풍부해 누구나 흥미롭게 감상할 수 있다. 전문적 개념이나 이론을 자제하고 이야기를 들려주듯 작품을 소개해 동양화를 잘 모르는 독자도 편안하게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책에 수록된 그림은 이 시인이 "오랜 헤맴의 시간에서 실존적으로 만났던" 작품들이다. 저자를 강하게 '당긴' 그림은 금방 만날 수 있었고, 미술사의 흐름에서 선택된 그림은 며칠이고 들여다봐야 했다. "한 작품과 만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삶과 만나는 것이며, 그 삶에 스며든 역사의 추억과 만나는 것이기도 하죠. 그림 한 점에서 화가의 생애와 동아시아 미학적 이념, 시대정신을 관통하는 지점을 찾으려 노력했습니다."

■동양화에 관한 고정 관념을 깨다

	수직의 비상을 꿈꾸는 이성의 '청만소사도'.

곽희, 범관과 더불어 북송 산수화의 3대가라 불리는 이성의 '청만소사도'(960년경·晴巒蕭寺圖)를 보자. 비의 푸른 비늘이 묻어 있을 듯한 청량한 늦가을의 대기, 골짜기가 피워내는 엷은 안개, 알 수 없는 어떤 무한의 내부처럼 열리는 이내(해 질 무렵에 멀리 보이는 푸르스름하고 흐릿한 기운) 속에 홀연히 솟은 장엄한 산봉우리, 그 아래 소슬한 사원이 있다.

이성은 당나라 종친의 후예였다. 당이 망하고 오대십국이 난립하던 시대를 살았다. 시대는 나라를 경영하고자 했던 지식인의 꿈을 좌절시켰다. 어떤 이들은 '청만소사도'가 장엄한 질서(理)의 우주관을 세우고자 했던 신유학자의 신념을 표현했다 하지만, 저자의 해석은 다르다. 저자는 산의 솟는 힘을 극대화하는 '하강하는 폭포'에 주목했다. "폭포의 장쾌한 하강에는 역으로 은하 세계로 아득히 비상하는 은밀한 욕망이 숨어 있다. 쫓겨난 신선 이백(李白)의 소슬한 반어법 아니겠는가"하고 설명한다. 때를 만나지 못해 화가로 살아야 했던 지식인의 불가능한 꿈이 그림에 배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동양화=산수화=여백'이라는 고정관념을 산산이 깨뜨린다. 5m가 넘는 긴 두루마리에 북송의 수도 변량의 번영했던 상업 활동을 파노라마처럼 묘사한 '청명상하도'(11~12세기·淸明上河圖)는 경이로운 사실주의 작품이다. 800여 명의 인물, 73마리 축생, 20개가 넘는 수레와 가마, 20여 척 배가 사진처럼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송·원 교체기를 살았던 공개(1222~1307)의 '중산출유도'(中山出游圖)는 귀신들이 주인공이다. 귀신 잡는 귀신인 '종규'와 종규의 여동생, 졸개 귀신의 익살스러운 행렬이 담겼다. '원나라'라는 몽골 악귀를 토벌하려는 퇴마의 그림에는 비분강개와 유머가 함께 느껴진다. 왕몽(1308~1385)의 '구구임옥도'(具區林屋圖)는 여백이라고는 볼 수 없는 빽빽함의 진수를 보여준다. 저자가 특별히 추천하는 고굉중(910~980)의 '한희재야연도'(970년경·韓熙載夜宴圖)에는 남당 시대 기인 한희재의 밤 향락이 시간 흐름에 따라 다섯 장면으로 재구성됐다. 신하의 밤 향락을 훔쳐보려는 군주의 관음증이 서성거리는 작품이다.

■동양 그림에서 보는 문명의 대안

동양화는 다양한 형식과 흥미로운 내용을 담았지만, 서양화 만큼 관심을 받지 못한다. 이 시인은 "동양의 역사가 패배의 역사였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그는 "동양적인 것, 동아시아적인 것에 대한 선입견이 있다. 열등하고,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양 석학들이 오히려 동양사상, 동아시아적 사유를 찾는데 우리는 여전히 못 보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자연의 리듬과 교감하는 전선의 '부옥산거도'.

이 시인은 동아시아 미학에서 서양 근대 사상을 극복할 단서를 발견했다. "전선(1235~1307)의 '부옥산거도'(浮玉山居圖)는 호수에 둘러싸인 세 개 섬을 수평으로 배열했는데, 시점이 각각 다릅니다. 첫 번째 섬은 수면에서 바라본 풍경이지만, 두 번째 섬은 수면보다 위에서, 세 번째 섬은 하늘에서 본 풍경입니다. 실제 풍경과 물에 비친 풍경 등 '이중적 시선'이 한 그림에 표현된 것입니다. 주체를 중심으로 세계를 보는 서양의 '원근법'과 다른 동양의 '흩어진 시점(산점투시)'이 나타나 있습니다. 원근법으로 대표되는, 나와 너를 대립시키는 서양 근대 문명을 극복할 '오래된 미래'가 동아시아 미학에 있습니다."

	이성희 시인이 화보집을 보며 동양화의 매력을 설명하고 있다. 김종진 기자 kjj1761@kookje.co.kr

이 시인은 "오래 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품이 있는 미술관에 가는 것도 좋지만, 고화질 화보나 디지털 이미지를 구해 오래 보라"고 조언했다. "산수화에 난 길을 따라 여행하다 보면 제가 쓴 글 이상의 또 다른 만남이 가능합니다. 작품의 의도는 중요치 않습니다. 관람자와 만남에서 그림의 새로운 의미가 창조됩니다."



※미학자 이성희=부산대 철학과 졸업. 1989년 '문예중앙'으로 시인 등단. 부산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노자 연구로 석사, 장자 연구로 박사 학위 받음. 시집 '겨울 산야에서 올리는 기도' 등. 저서 '무의 미학' '빈 중심의 아름다움-장자의 심미적 실재관'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동양명화감상' '미학으로 동아시아를 읽다'.


박정민 기자 link@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