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현주 책칼럼니스트가 문학과 인문학의 저자를 직접 찾아간다. 글과 삶의 터전에서 저자를 만나 책과 삶에 관해 깊이 이야기를 나누고 격주로 독자들께 생생히 전한다.

- 하동 악양 동매리의
- 햇볕 환히 드는 집에서
- 처마 밑 곶감을 조물조물
- 맛있게 익으라고 만져주는
- 박남준 시인을 만났다

- 젊은 날엔 혼자라는 게
- 견디기 힘들 때도 있었으나
- 이제 어둠 내린 집에 홀로 앉아
- 내면의 울림을 듣는다고 했다
- 지리산 시인의 충만한 나날

박남준 시인의 시집 '중독자'는 경남 진주의 30년 토박이 책방 '진주문고'를 모체로 2015년 설립된 지역 출판사 펄북스가 펴낸 첫 번째 책이다.

박남준 시인이 경남 하동군 악양면 동매리의 자택 심원재 마당에서 햇볕을 쬐고 있다. 처마 밑 곶감이 탐스럽다.

이 시집에 재미있는 시가 한 편 있다. 시인의 단골 콩나물 국밥집 아주머니는 박남준 시인이 성공하기 전까지는 국밥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시 '성공하지 못했다'를 읽으면 시인과 국밥집 아주머니의 마음이 보인다.

'뚝배기 밑에 돈 놓고 나오다가 걸리기도 했다/후다닥 내달리고 아주머니 돈 흔들며 쫓아오고/나는 무단횡단으로 건널목 뛰어가고/아주머니 골목길에 매달린 채 헐떡거리며/삼춘 거시기 이러면 안돼야 발 동동 구르고…'.

국밥집 아주머니에게 박남준은 끝내 성공하지 못한 시인이 되고 말았단다. 시인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며, 자신의 시를 가슴에 둔 독자들을 만났을 때 감사하고 또 부끄럽다고 말했다.

일시 정지된 장면 같은 겨울 지리산 자락은 바람이 찼다. 시인이 사는 경남 하동 악양 동매리에는 햇볕이 가득했다. 악양(岳陽)이라는 이름은 큰 산과 밝은 햇볕을 담고 있다. 햇볕 환한 악양에서 시를 쓰는 시인 박남준을 겨울에 만난 것은 생명 이야기를 듣고자 함이었다. 동매리 입구에서 지리산 자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인의 집 '심원재(心遠齋)'가 있다. 처마 밑 곶감이 주홍빛 보석처럼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심원재 겨울 풍경이다. 박남준은 시 '악양'에서 이렇게 썼다.

'늙은 돌담 너머 감나무들 어쩌자고/저리도 곱게 꽃등을 켜 드나/누가 누가 세상을 밝히나/땀 흘려 온 것들이 익어서 스스로 고개 숙인다/눈이 오는가 처마 끝에 내건 곶감들 풍경처럼 흔들린다/지리산 자락 햇볕 쏟아지는 들/섬진강 가 은모래 반짝이는 곳/어찌 엎드려 살지 않겠는가'.

전주 모악산에서 살다 악양으로 온 지 13년. 이곳에서 시집 '적막' '그 아저씨네 간이휴게실 아래' '중독자'를 펴냈다. 모악산에, 악양에서, '생명평화탁발순례' 길에서 쓴 시가 실린 시집들이다.

겨울에 만난 그에게서 생명 이야기를 끌어내려니 4대강 사업 때 이야기를 거치지 않을 수 없었다. "강이 품은 그 많은 생명이 죽어갈 것을 생각하면 잠을 이룰 수 없었죠. 죽어 나갈 생명들이 떠오르면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고, 여기 가만있다간 좌절만 하고 절망만 할 것 같았어요.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됐는데, 시 한 편 쓰는 것이 다가 아니더라고. 그때 수경 스님과 전화를 했습니다. 내가 죽을 것 같아서, 내가 살고 싶어서, 생명을 살리려는 사람들과 함께 길을 걸었습니다."

박남준 시인은 4대강 사업에 마음 아파 생명평화탁발순례에 올랐던 때를 이렇게 떠올렸다. 자연, 생명, 그 안에서 사는 사람, 그 모든 것과의 관계를 시로 써온 시인으로서 당연히 걸어야 했을 길이다. 그는 시인을 '시대의 질곡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 했다. 잠수함의 토끼처럼 먼저 고통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생명평화탁발순례도 그랬다. 그 시간을 담은 시들이 시집 '그 아저씨네 간이 휴게실 아래'에 실렸다. 시 '강물을 따라 흐르네'는 이렇게 흐른다.

'나 내딛는 한 걸음이 이 땅의 강을 살리는 일이라면/그 강에 찾아오는 새 떼들의 노래하는 날갯짓/끊이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강을 따라 흐르는 걸음 어찌 함께 하지 않으리/그리하여 내딛는 한 걸음이/강을 거슬러 오르는 은빛 비늘의 물고기 떼들/물길의 나침반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일이라면'

박남준의 시에서 서정과 사랑을 느끼던 독자는 이 시들이 낯설지 모르겠다. 강하고 엄정한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이라 그렇다. 시인 박남준은 1957년 전남 법성포에서 났다. 1984년 '시인'으로 등단해 시집 '그 숲에 새를 묻지 못한 사람이 있다'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 등을 냈고, 산문집 '꽃이 진다 꽃이 핀다' '박남준 산방일기' '스님, 메리크리스마스' 등이 있다. 한국시의 전통 서정을 바탕으로 일상 언어로 시를 쓴다.

시집을 앞에 두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문득 일몰 무렵이면 어떤 기분인지 궁금했다. "젊은 날엔 지나간 많은 시간이 밀려오면서 혼자 견뎌내기 힘들 때가 있었지. 지금은 가만히, 내 안의 울림을 들여다봅니다." 어둠이 내린 작은 집에 홀로 앉아 내면의 울림을 듣고, 그 말을 받아쓰는 시. 그립고 외로우나, 또한 충만한 시간이 아닐까.

동매리 일몰을 못 보는 아쉬움을 떨치고 일어서는데, 시인이 처마 아래 곶감을 매만졌다. "이렇게 조물조물 만져주면 색도 고와지고, 부드럽고 맛있어지죠." 생명 앞에 엎드리는 시인의 손길이 매일 더해지는 곶감, 지금쯤 부드럽고 곱고 맛있게 말라가고 있겠다.

▶필자 약력=동보서적 서평잡지 '책소식' 편집장 18년(1993~2010년)간 역임. 라디오에서 책 소개 방송 20여 년 째. 책 강사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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