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죽한 밀가루를 넓게 펼쳐 척척 접고
- 무심한 듯 숭덩숭덩 썰어낸 넓적한 면
- 어떤 놈은 얇아서 호르륵 넘어가고
- 어떤 놈은 두꺼워서 쫄깃쫄깃 씹히는 맛

- 칼국수 없는 시장 어디 있겠냐마는
- 영주시장 서면시장 멸치국물에 삶아낸 '그냥 칼국수' 일품이라

- 이주한 전라 사람들 손끝에서 나왔다는 영도 팥칼국수
- 온천장·초량에 특히 많은 짜장칼국수
- 부산답게 해물 듬뿍 해물칼국수도 유명하네

칼국수만큼 쉽게 조리하여 한 끼 뚝딱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있을까? 게다가 다양한 베이스의 육수와 소스, 고명을 지역에 따라, 계절에 따라 편하게 활용할 수 있는 음식 또한 칼국수이다.

수더분하면서도 먹음직한 시장칼국수. 이른바 '기본 칼국수' 스타일이다.

그래서 칼국수의 종류는 셀 수 없이 많다. 서울 경기 지역의 사골칼국수와 닭칼국수, 서해안의 바지락 칼국수, 제주도의 해물칼국수, 전라도의 팥칼국수, 강원도의 장칼국수, 충청도의 얼큰이 칼국수 등이 그것이다.

칼국수의 사전식 정의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홍두깨 같은 방망이로 얇게 밀고, 칼로 가늘게 썰어 만든 면을 육수나 장국 등에 끓여서 먹는 음식'이다. 특히 겨울을 나는 서민들의 따뜻한 한 끼의 식사로, 쫄깃한 면발과 뜨끈한 육수가 일품인 정겨운 토속 음식이다.

조선 시대 가장 오래된 한글조리서인 '규곤시의방'에 '절면(切麵)'이라는 명칭으로 칼국수는 처음 등장한다. 당시 칼국수의 주재료는 메밀가루였다. 밀가루는 점성을 더하기 위해 섞어서 쓴 것으로 보인다. 그 시절 밀가루는 매우 귀한 식재료였기에 그렇다.

밀은 주로 추운 지방에서 재배되는 곡식이라, 우리나라 기후에서는 대량 재배가 어려웠다. 송나라 사신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서는 '고려에는 밀이 적기 때문에 화북에서 수입하고 있다. 따라서 밀가루의 값이 매우 비싸 성례(成禮) 때가 아니면 먹지 않는다'고 기술했다. 이런 이유로 예부터 칼국수를 비롯한 밀가루 음식은 여름철 별식이었다. 음력 6월 전후가 밀 수확기이기 때문이다. 밀을 수확한 후 여름철 별미로 마을 사람들과 나눠 먹던 음식이 칼국수다. 칼국수에 애호박이나 감자, 쑥갓 등속을 고명으로 올리는 것도 그즈음 많이 나는 식재료여서 그렇다.

■칼국숫집 없는 시장이 있을까

이렇게 여름 전후의 계절 음식인 칼국수가 사시사철 즐겨 찾는 대중음식이 된 것은 한국전쟁 뒤부터이다. 당시 외국에서 보내준 구호물자로 밀가루가 우리나라에 대량 들어오면서, 국수와 칼국수, 수제비 등 밀가루를 재료로 한 음식이 서민 음식으로 널리 보급된다. 특히 부산에서는 구포국수를 비롯하여 '밀가루 냉면'인 밀면이 발달한 것만 봐도 밀가루 활용도가 높았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유행한 '삯국수'도 배급받던 밀가루를 일정량 삯으로 내고, 밥 대신 주식으로 삼았던 국수를, 국수공장에서 뽑아 먹었던 것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밀가루 음식이 서민 음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시장에서도 자연스럽게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시장은 서민들이 가장 친근한 생활경제공간. 이곳에서 많은 이들이 활발한 경제활동을 하는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잠시 짬을 내 끼니를 때우는 밀가루 음식이 다수 발달한다.

밀가루 반죽을 썰어 칼국수 면발을 만드는 모습.

그 대표적인 음식이 '시장칼국수'이다. 큰 대접에 한 고봉 채워주는 뜨끈한 시장칼국수는, 싸고 오래도록 든든해 시장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특히 부산의 시장에는 칼국수 집이 없는 곳이 거의 없다. 어떤 시장은 칼국수 집을 중심으로 장이 형성될 정도이다. 그래서 시장칼국수는 시장의 정겨움이 살아있는 음식이다. 좁은 가게 안, 목로 의자에 낯선 이들과 어깨를 부딪치며 한 젓가락씩 후후 불어 먹는 음식이다. 칼국수 한 그릇 먹고 나면 서로가 이웃이 되고, 함께 밥을 먹은 식구가 되는 것이다.

영주시장과 서면시장은 40~50년을 훌쩍 넘긴 시장칼국수 집들을 중심으로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조리법이라고 특별한 것은 없다. 잘 반죽한 밀가루를 넓게 펴고 무심한 듯 숭덩숭덩 썰어내는 것이 시장칼국수의 특징이다. 그래서 일반 칼국수보다 면발이 굵고 통통하다.

면의 굵기가 들쭉날쭉하여 식감이 다양하므로 씹는 재미도 꽤 있다. 굵은 면발은 쫀득쫀득하고, 얇은 면발은 부드럽게 목을 타고 넘어간다. 특히 멸치, 밴댕이를 섞어 우려낸 육수는 시원하면서도 짙고, 구수하면서도 감칠맛이 돌아 최고의 국물 맛을 선사한다. 술을 마시고 난 다음 날, 심한 숙취를 시원하게 가셔주는 해장용으로도 손색이 없다.

■시장별로 특화된 다채로움

빛깔이 탐스러운 팥칼국수.

부산의 시장칼국수 세계에는 시장마다 기본 칼국수와 함께 짝을 이루는 칼국수가 있다. 대표적인 메뉴가 비빔칼국수. 중국음식점의 '짜장면과 짬뽕' 관계이다. 계절에 따라 냉칼국수와 콩칼국수도 따라붙는다. 이들이 보편적인 시장칼국수의 주 메뉴이다.

여기에다, 부산의 시장칼국수에는 시장별로 지역별로 특화된 칼국수들이 더 있다. 기본 칼국수 외에 해물을 듬뿍 넣은 '해물칼국수', 걸쭉한 짜장소스를 얹어 비벼 먹는 '짜장칼국수(일명 칼짜장)', 팥을 진하게 쑨 팥물에 칼국수를 넣고 끓인 '팥칼국수', 칼국수와 당면을 함께 섞어 식감을 최대화한 '당면칼국수' 등.

'해물칼국수'는 풍부한 수산물이 나는 지역의 특색을 반영하고, '짜장칼국수'는 화교들의 부산 정착에 영향을 받아 유독 짜장면을 좋아하던 부산사람들의 식성을 대변한다. '팥칼국수'는 전라도 지역의 향토 음식으로, 부산의 산업화 과정 속에서 전라도 출신의 노동 인력이 대거 부산에 정착하면서부터 형성된 음식이다.

그중 지역별로 특화된 시장칼국수를 꼽자면, 온천장·초량의 '짜장칼국수', 영도의 '팥칼국수', 서면의 '당면칼국수' 등을 들 수 있다.

담백하고 쫄깃한 짜장칼국수.

부산은 '짜장면의 도시'라 할 정도로 중국 음식을 흔히 접하고 시민도 좋아한다. 중국음식 노출 빈도가 높은 도시이다. 특히 짜장면은 첫 손가락에 꼽히는 중국음식계의 소울 푸드이다. 거의 한 집 건너 중국음식점이 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이다. 특히 호주머니 가벼운 젊은 청춘들의 짜장면 사랑은 짜장면보다 비교적 값은 싸고 양은 많은 '짜장칼국수'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 칼국수 특유의 깔끔한 맛과 짜장 소스 특유의 맛과 잘 어우러진다.

영도에서 유독 '팥칼국수'가 발달한 것은 전라도 사람들의 이주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일자리를 찾아 부산에 정착한 전라도 사람들이 영도와 그 주변에 많이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이들이 고향 음식을 함께 나눠 먹다가 시장을 중심으로 팥칼국수를 하나둘 팔게 된다.

■쫄깃한 면발, 시원한 국물

서면의 시장통으로 나간다. 시장 한구석에서 당면칼국수 한 그릇 시킨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칼국수가 식탁에 놓인다. 구수한 멸칫국물 냄새와 참기름이 조금 들어간 양념장 냄새, 향긋한 파 냄새가 어우러져 입안에 군침이 맴을 돈다.

한 젓가락 집어 올려 입에 넣으니, 뜨거운 열기가 얼굴에 와 닿는데, 겨울 음식으로 손색이 없다. 한 입 크게 먹으니 칼국수 면발과 당면이 어우러지면서 쫄깃쫄깃 꼬들꼬들 씹는 맛이 여간 재미난 것이 아니다. 국물을 그릇째 들고 후후 불어대며 마신다. 뜨거운 국물이 목을 타고 넘어가며 오히려 시원함이 돈다. 멸칫국물의 깊고 진한 맛을 보다 보면, 어느새 이마와 목덜미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다.

넉넉하고 정성스런 부산 아지매들 손맛이 물씬 느껴지는 음식, 시장칼국수. 싸고 맛있는 시장칼국수 한 그릇으로 이 겨울, 춥고 허기진 배를 달래보는 것도 좋은 일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