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추억 하나. 명절날 찾아가는 큰집 부엌에는 차례음식으로 풍성했다. 여러 개의 채반에는 차례상에 올릴 산적과 부침개들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먼지가 내려앉지 말라고 흰 한지도 곱게 덮여 있었다.

추억 둘. 어머니는 마당에 비질을 한 뒤에는 장독대에 물을 끼얹었다. 유리그릇을 닦기라도 하듯 장독 하나하나를 깨끗이 닦았다. 어머니의 장독은 늘 반들반들 윤이 났다.

추억 셋. 이른 봄날 뒷동산에 쑥 캐러 가는 동네언니들을 따라 나서는 내 손에는 가는 댓가지로 엮어 만든 바구니가 함께 했다. 언니들만큼 많이 캐진 못했지만, 쑥을 캘 때마다 흙먼지를 깨끗이 털어냈다. 한 번도 대바구니가 쑥으로 가득차진 못했지만, 그걸 들고 집으로 돌아올 때는 나도 모르게 어깨가 으쓱했다.

채반, 장독, 대바구니…. 이런 물건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문득 집안을 둘러보면 "세상 참 많이 달라졌다"는 말이 절로 나올 만큼 많은 물건이 사라지고, 새로운 것들이 그 자리를 대신 차지한 풍경과 마주하게 된다.

'살림살이'라는 책을 처음 펼쳤을 때 나는 옛 물건들을 다시 만났다. '겨레전통도감' 시리즈 중 한 권으로, 우리네 살림살이에 쓰인 물건들을 세밀화와 함께 소개한 책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로 나누어 각 계절의 살림살이가 어떻게 달랐는지도 말해준다. 이남박, 푼주, 초병과 초단지, 자라병, 동고리, 물두멍, 손풀무, 확과 확돌, 먹동구미, 소줏고리…. 이제는 이름조차 잊히고 있는 살림살이들, 민속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물건들을 자세히 그린 세밀화를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살림'이란 무엇인가. 사람이 먹고 자고 입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보살피는 일이다. 사람을 보살피고 살리는 일이다. 그래서 '살림'이다. 오래 사용하는 동안 각각의 쓰임새에 맞게 조금씩 고쳐 썼던 많은 물건들이 우리네 살림살이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책 속의 전통 살림살이를 소개하는 문장은 입말로 씌어졌다. 그래서 할머니가 손녀딸을 데리고 장독대, 우물가, 부엌, 안방, 광을 샅샅이 돌며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 같다. 가을 살림살이를 설명한 대목은 이렇다. "먹을거리가 많은 이 무렵에는 오래 두고 먹을 음식들을 말리기 바빠. 마침 볕이 좋고 바람이 서늘한 때라 널어놓기 무섭게 마르거든. 호박, 박, 고구마 순, 산나물, 버섯, 생선 들을 잘 말려 두면 겨우내 든든한 먹을거리가 되지. (중략) 여름내 쓰던 사기그릇은 이제 갈무리해 두고 놋그릇을 꺼내지. 천천히 겨울을 준비하는 거야."

애써 지은 농사의 결실을 다듬는 여인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마트와 시장에 가면 사시사철 식재료를 살 수 있는 현재와 비교해보면 불편하고 시간도 많이 필요했을 것이다. 하루 종일, 일 년 내내, 그리고 어쩌면 한 집안의 안주인으로 사는 전 생애를 다해 손에 물마를 시간이 없었을 게다. 사람을 살리고 보살피느라 몸도 마음도 바빴으리라.

주인공도 없고 드라마틱한 스토리도 없지만 재미있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이 책은 할머니와 어머니가 등장하는 옛이야기 같다. 그리고 내가 그들의 살림으로 지금까지 무탈하게 살아내고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살림, 진정 고마운 일이다.

북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