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신 대지진 경험 바탕으로
- 금속 쌓아 나약한 도시 표현

- 12일 작품 중 일부 무너지자
- 작가 "오히려 주제의식 분명"
- 보완 않고 그대로 전시하기로

지난 12일 오후 한반도를 강타했던 역대 최강 지진이 부산비엔날레에 출품된 한 작품의 주제의식을 더욱 선명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당시 잇따라 발생한 강진으로 부산비엔날레 조직위원회에는 비상이 걸렸다. 세계 각국에서 가져온 출품작이 훼손된다면 금전적인 보상은 물론이고 회복 불가능한 피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이번에 출품된 회화 작품 중 중국 작가 팡리쥔의 '2014-2015'는 무려 50억 원에 이르는 고가이다.

지진 발생 다음 날 전시장인 F1963(고려제강 옛 수영공장)과 부산시립미술관을 살펴보던 관계자들은 깜짝 놀랐다. 시립미술관에 전시된 일본작가 에노키 츄(72)의 작품 'RPM1200'의 일부가 쓰러졌다. 이 작품은 한국·중국·일본의 1960~1980년대 아방가르드 실험미술사를 조명한 '프로젝트 1' 전시의 하나로 가로 5m, 세로 4m, 높이 3.5m 공간에 금속 조형물 수백개를 용접하지 않고 세운 설치작품이다.

에노키 츄는 16세 때 고베로 이주해 지금까지 고베를 창작의 거점으로 삼고 활동하는 전위미술가다. 작가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탓에 젊은 시절 화단에서 배척당한 뒤 선반공으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다. 퇴직 후 다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한 그는 원자폭탄이나 다이옥신과 같은 유독 물질을 모티브로 한 대규모 설치미술 작가로 이름을 알렸다.

이번 지진으로 쓰러진 그의 작품 'RPM1200'은 1995년 고베지역을 강타한 한신 대지진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했다. 이 작품은 그가 선반공으로 일하며 익숙해진 철 소재를 사용해 만든, 총 중량이 수 t에 달하는 도시 형태의 설치미술이다. 자신이 사는 도시의 파괴를 눈앞에서 목격한 그는 일견 단단해 보이지만, 한순간에 무너질 수 있는 도시의 속성을 작품에 형상화했다.

시립미술관과 조직위 관계자들은 작품 일부가 쓰러진 것을 발견한 직후 바짝 긴장한 상태로 작가에게 이를 알렸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작가가 "'RPM1200'은 자연재해 앞에 나약한 도시의 속성을 담은 작품인데 지진으로 작품 일부가 쓰러져 오히려 주제의식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 작품을 다시 세우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이에 조직위는 작가의 뜻을 존중해 작품을 현재 상태 그대로 전시할 계획이다.

현대미술에는 관람객의 참여와 반응에 따라 작품의 결과가 달라지는 '인터랙티브 미술' 장르가 있다. 예기치 못한 지진이 오히려 'RPM1200'과 상호작용해 작품을 완성한 셈이다. 박정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