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의 계절 5월이 오면 정읍에서는 전봉준 장군과 동학농민군의 황토현 승리를 기념하는 동학혁명기념제가 열리고, 이 고을의 사람들은 올해도 5월 한 달 동안 노란 현수막을 내건다.


"사인여천(事人如天), 생명을 하늘처럼 섬기는 대한민국을 만들어 갑시다!"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잡아 백성을 편안하게 하라!"

전북 정읍시 시민단체 회원이 내건 '보국안민' 깃발.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지고(至高)의 존재이며, 이 높은 존재들이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122년 전, 동학농민군들이 갈구했던 세상,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사회, 상생하는 사회에 대한 염원을 담은 이 외침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보국안민, 사인여천과 함께 동학의 창시자 수운 최제우의 생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은 인내천, 즉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말이다. 왕도 신하도 백성도 하늘이며, 남자도 여자도 하늘, 어른도 아이도 주인도 하인도 하늘, 모든 사람이 존귀하다는 만민평등의 사상이다.

수운 선생은 오랜 구도 끝에 1860년 4월 결정적으로 '한울님' 체험을 한다. 수운의 득도 소식에 민중은 새 소식을 갈구하며 수운의 고향 경주 용담으로 구름처럼 몰려든다. 수운은 한울님은 바로 너희들 자신의 몸 안에 모셔져 있으니, 먼 곳에다 빌지 말라고 한다. 우리의 삶 가운데 한울님이 계시고 우리 모두 한울님을 모셨다고 가르친다.

수운의 가르침은 당시 가난하고 천대받던 사람들,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지 못한 이들, 시대의 변화를 꿈꾸던 민중에게 열렬한 호응을 받았다.

수운의 가르침을 이어받은 해월 최시형에게는 사람만이 하늘이 아니었다. 짐승도 하늘, 식물도 하늘, 모든 생명체가 다 하늘이었다. 인간 중심을 넘어 생명 중심이었다. 우리의 일상사 모두 또 우리를 둘러싼 모든 사물로 공경의 범위는 확대되었다.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과 물건을 다 같이 귀히 여겼다. 천지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고, 우주만물이 모두 하나의 기운이니 상호부조, 즉 서로 돕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라 했다.

하여 해월은 "'물건마다 하늘이요 일마다 하늘이요(물물천사사천 物物天 事事天)', 모든 물건이 다 '하늘로써 하늘을 먹는 것(이천식천 以天食天)' 아님이 없다"고 하였다.

이런 일화가 있다. 해월이 어느 도인의 집에 갔다. 그 도인은 밥상을 차려 냈으나 채소를 제대로 거두지 못해 반찬이 적다며 송구스러워했다. 그 까닭을 물으니 채소에 벌레가 들었는데 물건마다 하늘이라 했으니 벌레도 한울님이므로 손을 대지 못하여 그리되었다고 하였다. 이튿날 길을 가면서 같이 가는 제자를 보고 "간밤에 그 사람과 같이 신앙하면 도가 망하는 것이네" 하였다.

이 일화는 게으른 도인이 채소가 전멸한 것을 '물물천'의 이치로 궁색하게 변명한 것으로 원칙에만 고지식하게 얽매이는 융통성 없는 태도를 경계한 것이었고, 부분에만 집착하여 '이천식천'이라는 큰 줄기를 놓친 어중떼기 도인을 경계한 것이었다.

천도교 '신인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