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년 간 무대서 산 예순 윤석화
- 마리아 칼라스돼 열정 토해내

'행복한 예술가'가 존재할까? 왠지 형용모순처럼 느껴진다. 행복은 예술을 감상하는 객체의 몫일지는 몰라도 예술을 행하는 주체의 몫은 아닌 것 같다. 고흐, 베토벤, 박수근…많은 경우 그랬듯이 예술은 창작자의 불행, 고통, 시련을 먹고 자란다. 그 아픔의 씨앗을 누가 뿌렸는지는 논쟁적일 수 있다. 예술에서 재능과 노력의 힘겨루기만큼이나 지난하게. 어쨌든 결론만 놓고 본다면 불행한 예술가는 행복하다.

20, 21일 부산시민회관에서 열린 연극 '마스터 클래스'에서 윤석화가 열연하고 있다. 부산시민회관 제공

여기 그 주인공이 있다. 마리아 칼라스. 뚱뚱하고 못생긴 그리스인 여자. '노래의 여신'으로 승리하고 연인의 '카나리아'였던 적도 있었다. 남편을 버리고 그리스 선박왕 오나시스를 선택했건만 그가 세상 떠들썩하게 케네디 대통령의 미망인과 결혼하면서 버려진 여자. 유산으로 아이를 잃고, 자신을 '세계 최정상 소프라노'에 올려놨던 목소리마저 잃었던 여자. 높고 화려한 성취의 기쁨만큼 나락이 깊었던 여자.

연극 '마스터클래스'는 이 상황의 마리아 칼라스가 줄리아드 음대에서 했던 강의를 극화했다. 칼라스의 삶은 그 자체로 극적이지만 연극의 '마스터'가 누구냐에 따라 판이해진다. 모노드라마에 가깝게 느껴질 만큼 거의 모든 장면 등장해 엄청난 양의 대사를 쏟아내기 때문이다. 무대에 선 배우는 '마리아 칼라스'의 옷을 입고 자신의 삶을 끌어들여 관객의 가슴을 두드린다. 그래서 20일 부산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이 공연은 '윤석화의 마스터클래스'라고 할 수밖에 없다. 박정자의, 손숙의 마스터클래스가 아닌 윤석화이기 때문에 오는 감흥.

무대엔 하얀 벽이 설치돼 있다. 가운데 문이 열리면 마리아 칼라스가 등장한다. 객석을 향해 말한다. "박수는 안치셔도 됩니다. 수업을 하러 왔으니까요." 이어 "여러분은 학생들을 보러 왔어요. 이제부터 나에 대해선 잊어버리세요. 나는 투명인간이니까요. 쉬!"라고 손가락으로 입술을 가린다. 그러나 정작 제자가 노래를 시작하면 그의 문제점을 지적해 끼어들며 스스로 얼마나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였는지 역설한다. 제자의 노랫소리에 맞춰 황홀경에 빠져 노래하고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신이 이어진다. 그러나 입을 벙긋거릴 뿐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시범을 보일 때도 거칠고 낮은 목소리로 곡을 해석할 뿐 노래하지 못한다. 목소리가 나빠져 더는 노래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여전히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싶을 그녀의 상실, 상처, 상심. 목소리가 없는 데도 울림이 있다. 마리아 칼라스의 삶과 예술의 위대함은 기본이다. 또 다른 진원은 영광과 오욕을 끌어안고 40년을 무대에서 버틴 연극인이 60살의 나이에 변함없이 또렷한 발음과 목소리로 열정적으로 연기하며 눈물을 보여줬다는 데 있다.

극장을 나서는 길 휴대전화로 '윤석화'를 검색하니 주가조작혐의로 해외도피 중인 그녀의 남편 김석기 씨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윤석화' 명의로 수백억 원대의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소식. 30년 동안 학력을 속였던 과거를 비난하는 댓글도 따라붙었다. 그 시각 그녀는 하이힐을 신고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어 객석의 박수에 답하고 있었다. 이례적으로 커튼콜에서 마이크를 잡고 "객석이 많이 비어 있어 깜짝 놀랐다"고 웃으며 "내일 공연에 더 많은 관객이 올 수 있도록 입소문을 내달라"고 당부했다. 젊은 여성들의 기립박수에도 특별히 고마움을 표하면서. 윤석화의 마스터클래스는 어떻게 기록될 것인가. 그녀의 무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박지현 기자 anyway@kookj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