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에게 '내 인생의 책'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나는 주저 없이 최명희의 '혼불'이라고 답한다.

'혼불'은 일제강점기를 역사적인 공간으로, 남원 일대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청상과부로서 몰락해져 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효원)과 강모와 강실이, 그 자손과 식솔, 마을사람의 삶이 엮어가는 작품이다. 사람들은 이 작품을 대하예술소설이라고 부른다. 문학적 서사구조는 물론이고, 풍속과 문화, 우리 민족의 전통적 정서까지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최명희는 어릴 적부터 뛰어난 문재를 보였다. 백일장대회에 나갔다 하면 장원이었다. 전북 기전여고 학생시절, 소녀문사 최명희는 자주색 기전여고 교복을 입고 전국 각지의 백일장에 참여했다. '공포의 자주색'이라는 별명이 붙었을 정도였다. '동급 최강'이라는 말이 당시에도 있었더라면, 최명희에게 번번이 고배를 마셔야 했던 당시 전국의 고교생 문사들은 최명희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다.

최명희를 생각하면 국제신문과 동보서적이 주최했던 문학기행이 자연히 떠오른다. 2005년 2월의 그 여행을 통해 남원의 혼불문학관과, 최명희가 태어난 집안의 종가를 방문했다. 종가를 지키고 있는 어른에게 들었던 이야기는 지금도 생생하다.

전주에서 학교를 다니던 최명희는 방학이 되면 남원 사매면에 있는 종가를 찾아와 지냈다. 종가에서 지내는 동안 최명희는 일가친척 할머니 아주머니들이 주고받는 집안 대소사의 이야기를 들었다. 방 한구석에 조용히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이다. 아무도 본 적은 없지만, 최명희는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기록해두었을지도 모른다. 그 이야기들을 토대로 살을 붙이고 피를 흐르게 하여 '혼불'을 탄생시킨 것은 아닐까.

종가의 솟을대문. 그 높고 기품 있었던 솟을대문을 한참 올려다보았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러나 2007년 그 종가에 화재가 났다. 국제신문 혼불기행을 다녀온 독자들은 그 뉴스가 나던 날 다시 모여 안타까운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남편도 자식도 없이 양자를 키우며 스러져 가는 가문을 일으켜 세운 청암부인의 고독한 기상처럼 우뚝 솟아있던 솟을대문과 세월의 풍상을 묵묵히 바라보던 종가는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다음은 소설의 1부 '흔들리는 바람' 중 '사월령'편의 한 문장이다. "겨울이 끝나고 해토(解土)가 시작되면서 겨우내 얼어붙었던 땅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추위에 굳은 흙이 그 살을 풀었다. 그러고는 엊그제 가래질을 했던 듯싶은데, 벌써 골짜기마다 뻐꾸기 소리가 한창인 것이다. 뻐꾸기가 한 번 울면 진달래가 피어나고, 또 한 번 울면 버들잎이 피어났다. 그 새 소리에 눈짓하며 꽃들이 진다. 종달이도 명랑하게 지저귄다." 남원시 사매면 서도리 522번지. 그곳에서는 올해도 새 소리에 눈짓하며 진달래가 피고, 버들잎이 피고, 또 꽃이 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