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보기가 매일 업무인 나 같은 사람에게조차 TV에서 예고되는 '설날 특선 영화'라는 문구는 늘 야릇한 궁금증과 설렘을 일으킨다. 대부분 흔한 프로그래밍이라 이미 보았거나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들이라는 걸 경험상 잘 알면서도 그렇다. 며칠 전 설날에도 비슷했다. 이미 보았던 영화인데 지난 8일 밤 '극비수사'를 일부러 기다려서 보았다.

1970년대 후반 부산에서 일어난 실제 유괴 사건을 소재로 삼은 '극비수사'는 사건을 수사하는 공 형사(김윤석)와 김 도사(유해진)의 활약상을 담고 있다. 형사와 역술인이 한 조가 되어 사건을 해결한다는 설정이 재미있고 극의 전개도 간결하고 깨끗하며 리듬도 좋은 편이다. 다만 이번에는 멍하니 게으른 자세로 TV를 주시하던 중에 전과는 다르게 문득 한 장면이 흥미롭게 느껴졌다.

공 형사와 김 도사가 범인을 잡은 뒤 아이를 찾는 순간이다. 이때 발견된 아이의 행동이 예상외다. 아이는 무언가 혼란스러움을 느끼자 저기 뭉쳐서 서 있는 몇 명의 어른들 중에서 다른 사람이 아닌 유괴범의 품으로 달려가 덥석 안긴다. 물론 유괴범의 거짓말이 아직 효력이 남아 있어서 그런 것이기는 하지만, 낯선 어른 중에서 이 순간 아이에게 보호자는 자신을 유괴한 사람 밖에는 없는 셈이다.

유괴를 영화의 소재로 삼은 한국영화들 중에서 유괴범과 유괴된 아이 사이에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성립되는 영화는 드물거나 거의 없다. 때문에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이만희의 '0시'(1972)는 거의 독보적인데 이 영화에서 유괴범과 아이는 친구가 될 뿐만 아니라 역전된 보호자와 피보호자의 관계가 된다. 유괴된 아이는 유괴범을 설득하고 훈계할 뿐만 아니라 그가 처벌받을 순간에 그를 방어하고 나선다. 이 낭만적 역전의 상태가 대체로 허술한 이 영화의 크나큰 미덕이 된다.

우리가 근래에 볼 수 있었던 한국영화들 안에서 그런 관계는 거의 드물다. 유괴가 영화의 소재가 될 때 그 범죄의 잔혹한 수준 때문에라도 그 영화의 정서는 비정한 것이 되기 일쑤이다. 그래서 '그 놈 목소리'에서는 가여운 부모의 추격전이 벌어지고,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잔혹한 아이러니가 가세하고, '바람난 가족'에서는 끔찍한 돌발적 사건이 일어난다.

물론이지만 이 점이 한 편의 영화의 수준을 가늠하고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이 될 리는 없다. 요컨대 '극비수사'가 함께 거론한 영화들 이상으로 탁월한 영화인 것 같진 않다. 다만 '극비수사'에서 아이가 살아 있고 저 아이의 오인이 여전히 활발하게 작동해 형사가 아닌 형사 옆에 서 있는 범인의 품으로 달려 들어가는 장면이 이상하게도 내게는 역설적인 안도감을 주었다.

이 장면에서 아이가 범인 대신 공 형사에게 달려가 안겼다면 나는 그와 같은 안도감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유괴라는 끔찍한 범죄가 일어났지만 즉각적인 살해 대신 며칠 간의 별 수 없는 동거가 선택되고 그 동거의 유지를 위해 거짓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보호와 피보호의 관계가 성립되고 그게 지켜져 온 것에 대한 결과가 바로 그 장면에서의 유괴범을 향한 아이의 포옹일 것이라는 상상이 나를 약간이나마 안도하게 한 것 같다. 어쩌면 이 괴이한 미담이 이 영화가 설날 밤에 방영되는 이유이기도 하겠구나 하고 잠깐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