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저녁,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50대의 바다를 건너면서 극심한 근육통과 불면증을 견디다 못해 얼마 전 직장을 그만두고 대구로 내려온 친구를 당장에라도 만나고 싶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통화만 하는 처지다.

"숙아! 요즘은 잘 자니?"

"그냥 그래."

" 경자야! 잠 안 오는 밤에는 수다가 최곤데 그치. 언제 한 번 내려 가마"

'수다'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목이 메었다.

섬 탈출이 일생일대의 목표였던 우리, 함께 학력고사를 치고, 같은 대학에 원서를 내고, 그렇게 도시에 입성해 자취방에서 밤을 새워 수다를 떨며 서로에게 힘이 되었던 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래! 친구야, 수다가 고픈 밤이다."

"우리 막내 수능 끝나면 내가 한 번 올라갈게."

졸업 후 직장 따라 서울과 부산으로 친구와 헤어진 후 내 속내를 다 드러내놓고 누군가와 수다를 떨었던 적이 있었던지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직장에서도, 동창모임에서도, 이웃집 아줌마들과 대화에서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나'는 빠진 채였다. 오히려 속내가 들킬까 봐 조바심이 났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는 진정한 수다는 직장, 남편, 자식, 부모 등에 기댄 이야기가 아닌 오롯이 자기 이야기 즉 자신의 감정, 생각, 판단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세월이 갈수록 내 이야기를 잃어가고 있는 느낌이다.

10여 년 전 오한숙희라는 여성학자가 수다가 치유의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책을 내고 방송과 언론을 장식할 때도 관심 밖이었다. 그런데 몇 년 전 도서관에서 마음을 돌보는 책읽기 모임에서 수다가 사람 살려를 함께 읽으면서 저자의 수다요법이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체험했다.

저자는 애벌레가 껍질을 벗고 나비가 되듯 수다도 억압, 왜곡, 발설, 소통, 연대의 다섯 가지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 발달한다고 말한다.

사람과 더불어 사는 과정에서 어떻게 말을 잃게 되는지, 그와 동시에 잃었던 말을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되찾는지 보여주는 이 책은 저자가 10년 가까이 사람들과 수다로 만나온 생생한 체험기다. 남편의 외도로 받은 상처를 안고 어느 날 느닷없이 찾아와 1년 동안 저자의 집에 머문 여성, 우울증의 늪에 빠진 20대, 외로움 때문에 몸을 학대하는 여성 등과 치유의 수다를 펼치며 저자는 말하기가 곧 실존임을 증명한다.

특히 열아홉 피난민 소녀가장에서 40대에 남편을 여의고 병마와 싸우면서 무표현, 무감동, 무감각의 3무 여인이 된 어머니를 일으켜 세워 한 사람의 여성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수다스런 여인으로 웃을 수 있게 한 저자의 수다 치유과정은 가슴 찡하다. 더 추워지기 전 친구와 함께 그 옛날 돌아다녔던 동성로를 걸으면서 말하고 또 말하리라. 수다 품앗이를 하며 생의 한가운데를 걸어가자고.

부산시민도서관 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