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열렸던 부산시립극단 음악극의 한 장면. 국제신문 DB

- 40년 경력 연극인 응시도 못해

40년 가까이 지역 연극계를 누벼온 부산의 대표적인 연출가인 부두연극단 이성규(66) 대표. 그는 최근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 공모에 응했다가 관련 학위가 없다는 이유로 지원서가 반려돼 속앓이를 하고 있다. 동아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며 '극회' 활동을 통해 연극을 시작한 이 대표는 1990년대에는 7년간 부산예술대학에 출강한 적도 있어 관련 학위를 받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 대표는 "마지막으로 연극 인생의 모든 걸 쏟아 시립극단과 지역 연극계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싶었는데 관련 학위가 필요하다니 어이가 없다"며 아쉬워했다.

부산문화회관이 부산시립극단을 총지휘하는 예술감독을 공개 채용하면서 특정 분야 전공자로 응시 조건을 제한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는 현장 경험을 중요시하는 연극 무대의 현실을 무시한 것은 물론 학력 나이 성별 등 차별적 장벽을 허물고 있는 시대적 추세에도 역행한다는 지적이다.

부산문화회관은 지난달 5일 부산시립극단 예술감독 채용공고를 내면서 '해당 전공분야 석사 학위 또는 해당 전공분야 학사학위 이상 취득'한 자로 응시자격을 제한했다. 앞서 2012년 예술감독 체제를 도입하면서 전공 분야 범위를 '연극 및 연출'로 한정한 데 비해 일부 완화된 것이지만, 여전히 지원자의 범위를 특정한 것이다. 부산문화회관 관계자는 "예술감독은 일반 단원이나 기존의 수석연출과 달리 행정력과 이론·실기를 모두 겸비해야 하므로 관련 분야 전공이라는 제한을 두었다"고 설명했다.

문제는 이 같은 학력 제한 조항이 연극 분야의 특수성을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됐다는 점이다. 우선 지역 대학이 연극을 대학 전공으로 삼은 것은 그리 먼 일이 아니다. 부산에 연극영화과가 생긴 것은 1983년 경성대(당시 부산산업대학교)가 처음으로 고작 32년밖에 되지 않았다. 이전까지 대학 동아리나 극단, 극장 등 현장에서 연극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열린 채용을 하는 다른 대도시와 비교할 때도 시대적 흐름에 뒤떨어진다는 비난까지 일고 있다. 지난 6월 취임한 서울시립극단 김광보(51) 단장은 고졸 출신이다. 부산시립극단 수석연출을 역임하기도 했던 김 단장은 부산 금성고를 졸업한 뒤 가마골소극장 조명기사로 연극 무대에 발을 들여놓은 뒤 연출가가 됐다. 대구시립극단 예술감독직은 학사학위만 있으면 전공과 관계없이 누구나 응시할 수 있다. 대구문화회관 예술기획과는 2010년 시립극단 예술감독 공개모집 응모자격에서 '연극 관련' 학사학위를 응모자격으로 요구했다가 해당 자격을 갖춘 지원자가 없어 이를 폐기하는 정정공고문을 내기도 했다.

김문홍 연극평론가는 "현장에서 얼마나 많은 경력을 쌓았는지 능력 위주로 봐야지 학력으로 제한하는 것은 연극 예술의 특수성을 무시한 처사"라고 일침을 놓았다. 이에 대해 부산문화회관 이승호 관장은 "앞으로는 예술단별로 특성을 살린 자격 기준과 전형 방법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번 채용은 오는 20일 최종합격자 발표를 앞두고 있다.

◇다른 시립극단 채용 사례 보니 서울시립극단  지난 6월 취임한 김광보 단장은 고졸 출신으로 조명기사로 출발. 부산시립극단 수석연출 역임하기도. 대구시립극단 예술감독직은 학사 학위만 있으면 전공 무관. 2010년 공모 때 연극 관련 학위를 자격으로 요구했지만 지원자 없어 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