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진(1388~1462)의 동천문도도. 불사의 도를 찾는 여정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 자신이 애써 빚은 금속장식품
- 쇳물로 녹여지는 것 보고
- 화가로 전업한 명나라 대진
- '절파' 창시해 불후의 작품 남겨

- 그림 속 붉은 옷 선비가 향한
- 동굴은 속계·선계의 경계이자
- 환생의 삶 얻을 비밀의 문

- 큰 명성 얻고 궁정 화원 됐지만
- 모함에 쫓겨나 불우한 말년

젊은 금속세공사는 충격을 받았다.

그가 오랫동안 연마한 최상의 기술로 빚은 장식품들이 한 대장간에서 흔적도 없이 녹아 쇳물로 변하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친구가 말했다. "네가 장식품을 만들면 단지 부녀자와 아이들을 위한 잠시의 완상물이 될 뿐이다. 그러나 너의 뛰어난 재능을 비단으로 옮겨 그림을 그리면 가히 불후의 작품이 되지 않겠는가?"

그때부터 젊은 세공사는 그림을 그렸다. 그는 쇳물로 변하지도 않고 썩지도 않는 불사를 꿈꾸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불후의 화가가 된다. 명나라 절파(浙派)의 창시자, 대진(戴進, 1388∼1462)의 이야기다.

'동천문도도(洞天問道圖)'는 젊은 날 대진이 그림을 통해 불사의 도를 찾는 여정의 한 정점을 보여준다. 그림 속 사내는 그 정점의 입구에서 연한 홍포의 빛깔처럼 고요히 타오르는 내면의 물음표를 품고 있다. "도(道)는 무엇인가?" 묻고 있는 것이다. 물음에는 연금술의 메아리가 떠돈다.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게 된다면 대진의 이 정교하고 견고한 붓은 아마 다른 흐름을 가지게 될 것이다. 초기에 대진은 주로 남송원체화의 화법을 습득하였다. 그것은 마원과 하규로 대표되는 남송 화원의 화풍으로 세밀한 기교, 견고한 윤곽선, 일각(대각선)구도, 부벽준 등의 특징을 가진다.

■암벽, 육중한 질감의 부벽준

그림 속으로 들어가 대진이 던진 질문과 마주하기 위해 우리는 우선 그림의 안과 밖을 단절하면서 흐르는 계곡물을 발목을 적시면서 건너야 한다. 시야를 가리는 소나무와 암벽을 넘어서면 안개가 골을 따라 흐르면서 사람의 발자국을 지운다. 여기부터 세속의 자취를 한 걸음씩 버려야 한다. 무릎으로 스멀거리는 안갯속에서 암벽이 솟는다. 그 육중한 질감은 부벽준(바위의 표면을 도끼로 팬 것같이 그리는 준법)에 의한 것이다.

산 풍경은 좌우로 겹쳐지는 사선 구도(일각구도의 변형)를 이루면서 원경으로 접어든다. 우리의 시선도 '갈 지(之)' 자의 굽이를 틀면서 산의 심오한 내면으로 흘러든다. 그리하여 홍포를 입은 사내와 같이 신비로운 동굴 앞에 서게 될 것이다. 푸른 소나무와는 달리 입구의 앙상한 관목들은 지금이 겨울이거나 이른 봄 언저리임을 알려준다.

'동천(洞天)'은 도교에서 신선이 사는 곳을 말하지만, '洞'은 '동굴 동' 자이기도 하고 '꿰뚫을 통' 자이기도 하다. 신선이 사는 세계는 동굴로 통해 있다. 이 동굴을 통과할 때 다른 차원으로의 꿰뚫음(통찰,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동굴은 근경과 원경 구도의 경계이면서, 속계와 선계의 경계를 이룬다. 근경의 계곡물이 수평의 구도를 이룬다면 원경의 산들은 수직의 공간이다.

삶의 수평과 초월의 수직, 그 사이에 동굴이 있다. 계곡물이 움직임을 품고 있다면 산봉우리들은 영원으로 잠기는 부동의 세계다. 동굴은 동과 부동의 사이에 있다. 여기가 두 세계의 경계다. 발밑에서 스멀거리던 안개가 동굴 위로부터 신비롭고 아득한 허공을 피워내고 있음을 보라. 물음은 항상 경계에 서식한다.

'동천문도도'는 황제(黃帝)가 공동산 동굴에 사는 선인 광성자를 찾아가 도를 물었다는 '신선전'의 고사를 모티프로 한다. 황제가 물은 도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것은 연금술의 꿈, 불사의 비밀이었을 것이다. 이 비밀을 얻은 자를 신선이라 한다. 궁극의 물음 앞에 우리는 모두 혼자다. 황제는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이 겨울날, 그 물음 앞에 혼자 섰다. 또한, 불사를 성취하려는 대진의 예술적 욕망이 제기한 물음이기도 하였으리라.

■질시와 모함받아 쫓겨나

대진의 설산행려도. 만년의 작품이다.

동굴의 상징은 도교의 상상력을 감싼다. 도교 경전인 '도장(道藏)'의 분류 체계가 '세 개의 동'[三洞]으로 나누어져 있음은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내단(內丹)의 명상법에서 동굴은 신체의 단전을 의미하지만, 신화적으로는 자궁을 상징한다.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등장하는 도교의 경전 '황정경(黃庭經)'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자줏빛을 돌이켜 누런빛을 안고 단전에 들어가면

그윽한 방 안이 밝아져 양문을 비춘다.

(廻紫抱黃入丹田, 幽室內明照陽門)



비밀스런 암호 같지만 어쩐지 '동천문도도'를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것 같아 기이하다. '동천문도도'에서 자주빛(홍포)의 '누런 임금'(黃帝)이 동굴의 '그윽한 방'으로 들어가고 있지 않은가. 그 그윽한 방, 신화적인 자궁은 영웅이 들어가 죽는 곳, 죽어서 새롭게 태어나는 곳이다. 그리하여 빛이 생명의 문[陽門]을 비추리라. '죽음-재생'의 통과의례를 무사히 치렀을 때 비로소 영웅은 불사의 비밀을 얻게 된다.

'동천문도도'는 대진의 이름이 절강성 너머 남경에까지 알려지게 되고, 드디어 궁정 화원으로 추대되었을 무렵 작품인 듯하다. 그는 그때 이미 한 지평의 경계에 이르렀다. 대진이 영웅이라면 이제 죽음을 만나야 할 때인 것이다. 그는 다른 화원 화가들의 질시와 모함으로 궁정에서 쫓겨난다. '추강어조도'라는 그림에서 어부의 옷을 홍색으로 채색하였는데 그것이 불경스럽다고 문제가 되었다. 홍색의 장난이 참으로 묘하다. 한 기록에는 그가 화를 참지 못하고 미쳐서 결국 고향으로 돌아가 굶어 죽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연대기에 굴욕과 빈곤을 견디고 강호를 떠돌면서 불후의 명품을 남기게 되었다는 사실이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그는 어쩌면 불사의 비밀을 엿보았을지 모른다. '죽음-재생'의 동굴을 통과한 대진의 화풍은 남송원체화의 틀 속에 이성과 곽희, 미불 그리고 원4대가 등 모든 위대한 유산을 하나로 녹여 절파의 화풍을 새롭게 열었던 것이다.

■동기창마저 존경을 표하다

만년의 작품 '설산행려도(雪山行旅圖)'를 보면 선과 구도는 유려한 변화를 품으면서 훨씬 자유롭다. 초기의 견고한 형태를 벗어나 운필은 풍부한 운동감과 리듬으로 가득 차 있다. 문인사대부의 미학을 확립하려 했던 동기창은 절파를 기교에 치우친 직업화가들의 화풍으로 여기고 예도를 걷는 자가 결코 빠져서는 안 될 '마계(魔界)'라고까지 극단적으로 폄하하였다. 그러한 그도 대진에게만은 존경을 표했다. 절파와 대립한 오파와 교분이 두터웠던 유부 역시 대진에게 기꺼이 헌시를 바쳤다.



대진은 여러 대가들의 정수를 합하였다. […]

조화(造化)에 의하여 생각하고 그 정신을 알았다.

현묘한 도에 따라 묵묵히 움직이니

그가 움직이는 것이 바로 그림이 되었다.



더는 한 줌의 쇳물로 변하지 않을 불후의 작품을 남길 수 있었던 대진은 말년의 궁핍을 그리 서러워하지는 않았으리라. 경계에 서보지 않은 삶, 거기서 도를 물어보지 못한 삶이야말로 궁핍한 삶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