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계방대도 剡溪訪戴圖 - 황공망이 남긴 또 하나의 설경. 위진시대 '설야방대(雪夜訪戴; 눈 오는 밤 대안도를 방문하다)'의 고사가 담겨 있다.

나는 왜 백석의 시 '남신의주 유동 박씨봉방'의 그 싸락눈을 맞고 있는 "갈매나무"를 떠올렸는지 잘 모르겠다.

그림에는 이미 눈이 멎어 있다. 눈 그친 계곡의 적막이 열린다. 고립된 산마을의 여우 나는 골 이야기 같은 하얀 적막, 천 길 낭떠러지를 이루는 시퍼런 적막, 눈송이가 불려가는 저 어딘가의 무한으로 어깨를 반쯤 잠그고 있는 회색의 적막. 이 적막들이, 어두워 오는데 하얗게 눈을 맞고 있을 백석의 갈매나무를 떠올리게 한 것은 아마, 우선은 그 아득한 고적감 때문일 것이고 고적감을 견디는 맑고 정정한 기운 때문일 것이다.

금세 다시 눈이 내릴 것만 같은 풍경, 황공망(黃公望, 1269~1355)의 만년 작 '구봉설제도(九峰雪霽圖; 아홉 봉우리에 눈이 그친 풍경)'이다.

원(元) 4대가의 맏형 격인 황공망은 강소의 육씨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절강의 황씨 가문에 양자로 들어갔다. 자(字)는 황씨 집안이 아들 본 지가 오래 되어 자구(子久)라 지었으며, 호는 대치도인(大痴道人)이다. 그가 문관시험에 급제한 뒤 하급관리를 지낼 무렵, 원나라 중기 대표적인 탐관인 장려와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된다. 장려와의 연루는 그의 젊은 시절이 재물과 권력의 욕망에서 자유롭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한 번의 옥살이는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천하 떠돌며 왕몽 예찬 등과 교유

출옥 후 세속에 대한 야심을 버리고 구름처럼 떠돌면서 의술과 점복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다. 그리고 전진교(全眞敎)에 입문하게 된다. 전진교는 왕중양(王重陽)이 창시한 도교 일파이다. 그 교리는 내단 수련[眞功]과 가난한 자 고통받는 자를 위한 선행[眞行]을 닦아 온전한 참됨, 즉 전진(全眞)을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7080세대의 판타지였던 무협물 시장을 한때 완전히 석권했던 김용(金龍) 무협지의 주무대가 또한 전진교이다. 천하를 떠돌며 황공망은 왕몽, 예찬 등과 교유하며 함께 시와 그림을 논하고 그림을 합작하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부춘산에 은거하였다.

'구봉설제도'는 황공망이 81세 때인 1349년 그린 설경인데 그해 그가 남긴 설경이 한 점 더 전한다. '섬계방대도(剡溪訪戴圖)'이다. 여기에는 '설야방대(雪夜訪戴; 눈 오는 밤 대안도를 방문하다)'의 고사가 담겨 있다. 위진시대, 왕자유가 어느 밤 잠에서 깨어 문을 열어보니 세상이 온통 설국이었다. 흥취가 일어 술을 마시다 시를 읊고, 그러다 문득 섬계에 사는 친구 대안도가 보고 싶었다. 곧 밤배를 저어 대안도의 집 앞에 다다를 즈음 그는 배를 돌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까닭을 물으니 "흥이 일어 갔다가 흥이 다해 돌아왔다(乘興而行, 興盡而返)"고 하였다.

'섬계방대도'에서 윤곽선만 남은 바위와 산봉우리는 추상미를 품고 있지만 하단의 배와 집은 인간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황공망은 눈 덮인 언덕 뒤에 대안도의 집을 숨겨놓고 왕자유의 밤배가 돌아가는 모습을 그렸다. 어떤 것에도 구속됨 없이 흥취에 따르는 위진시대 명사들의 낭만적 풍도를 황공망은 흠모했던 모양이다.

양우재가 쓴 '산거신어(山居新語)'에 황공망의 일화가 있다. 황공망은 쇠피리[鐵笛]를 잘 불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황공망이 손님과 더불어 산에서 노니는데 호수 가운데서 피리소리가 들려왔다. 황공망은 "저것은 쇠피리 소리야"하며 자신도 쇠피리를 꺼냈다. 황공망은 쇠피리를 불면서 하산하고, 호수를 노닐던 자는 쇠피리를 불면서 산에 오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 돌아보지도 않고 피리 불기를 그치지도 않으면서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다. 누군가가 무어 중요하랴. 서로의 흥과 흥이 어우러지고 그러다 다하면 그만인 것을.

■단절의 벼랑, 앙상한 나무

구봉설제도 九峰雪霽圖 - 원나라 4대가의 맏형 격인 황공망(1269~1355)이 81세 때 그린 작품 '구봉설제도'. 그림 제목은 아홉 봉우리에 눈이 그친 풍경이란 뜻이다.

그러나 '구봉설제도'의 설경에는 그런 낭만적 흥취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여기에는 추상적 형상의 차가움 그리고 신비로운 고독과 침묵만이 대기를 가득 채울 뿐이다. 마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김현승) 왼쪽과 오른쪽의 마을은 서로 단절되어 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기괴하게 솟아오른 중앙의 바위산 아래, 계곡물과 연한 길을 가야 하지만 눈이 길을 끊은 듯 인적이 없다.

화면 전면에서 우리를 압도해 오는 바위산의 벼랑, 그 아래 계곡의 굴곡과 돌출은 화면을 양쪽으로 나눈다. 이러한 분리와 인적이 끊긴 길은 고적감을 강화한다. 이 길에 한 명의 행려라도 그려져 있었더라면 우리의 눈은 적이 위안을 받았을 것을…. 단절의 벼랑, 벼랑 위 앙상한 나무들은 매서운 겨울의 정신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그가 자신의 은거지를 그린, 중국회화사 불후의 명작인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담미(淡味)에 동원과 거연의 부드러운 입김이 서려 있다면, '구봉설제도' 암벽의 험준함에는 이성과 곽희의 준엄하고 치열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그러나 이제 그 위의 원경, 내부를 비워버린 추상적인 봉우리들로 눈을 돌려 보아야 한다. 여기에 오면 그 준엄함과 치열함도 비워지고 윤곽만 남는다. 그 비움을 흰 눈이 채우고 있으리라.

흰 눈은 채워질수록 풍경을 비운다. 비워져 어느 바람 사이에 저 눈 너머의 풍경으로 열릴까? 황동규의 시 '겨울의 빛'에서처럼.



눈이 내린다

눈송이 하나하나가 어둠 속에서

눈 내리는 소리로 바뀌는 소리 들린다

가 본 부석사와 못 가 본 부석사가 만나

서로 자리를 바꾸는 풍경이 나타난다



눈은, 모든 풍경을 덮는 눈은, 눈으로 본 적 없는 풍경을 연다. 원경의 아홉 봉우리는 형상을 넘어선 풍경을 꿈꾼다. 아니, 모든 풍경의 욕망을 넘어선 신비로운 침묵의 선정에 든 것일까? 이 고독 속에서야 비로소 온 천지와 감응할 힘을 얻는 것일까? 장자가 "절대 고독의 경지에서 천지 정신과 왕래한다(獨與天地精神往來)"라 하지 않던가. '구봉'은 강남 송강 일대 아홉 개 도교 명산을 칭한다. 고독한 늙은이, 황공망은 이 아홉 개 신비로운 봉우리를 한 화면에 불러 모았다. 그는 정정한 고독의 왕국을 건립한 것이다.

황공망의 죽음은 전설 속에 싸여 있다. 한 전설에서는 무림의 호포에서 황공망이 여러 손님과 노닐다가 한 바위 위에 섰는데 홀연 사방에서 운무가 자욱하게 밀려왔다. 운무가 지나가자 황공망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신선이 되어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지상의 나이 87세다. 이 늙은, 절정의 고수는 어쩌면 저 구봉의 봉우리처럼, 눈에 덮이면서 비워져 버린 겨울의 빛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숨 막히는 밀도의 침묵 속에서도 어디선가 아련히 주인 없는 피리 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황공망, 그의 영혼은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백석)처럼 저 산봉우리 어느 등성이에 서서, 홀로 싸락눈을 맞으며 하얗게 선정에 들어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