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켈란젤로 '아담의 탄생' 일부. 로마 바티칸 궁전 내 시스티나성당. 1511~12년. 출처 Erich Lessing/AKG

사람의 다섯 손가락 중 다른 네 손가락과 '맞서는' 자리에 있는 엄지. 유달리 굵고 짧은 이 엄지손가락 덕택에 인간은 예술을 창작할 수 있다. 맞서는 엄지를 쓴 작가 겸 고고학자 나이즐 스파이비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다른 손가락과 '맞서는' 엄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한다. '양손에 각각 넓은 각도로 위치한 엄지손가락 덕분에 다양한 굴절과 장악이 가능'한 까닭이다.

이 책의 부제는 '예술은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나'이다. 이 책을 통해 예술의 연원을 깊숙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여기에 엄지손가락의 상상력이 더해진다. BBC TV 시리즈 '예술은 어떻게 세상을 만들었나'의 진행자답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저자의 솜씨가 탁월하다. 선사시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지구 곳곳의 흥미진진한 내용으로 가득하다.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벽화 일부. 기원전 1만1000년 무렵. 출처 Giradon/Bridgeman Art Libray

저자는 '인간 특유의 상징·재현 능력'을 언제부터 갖추고 발휘했는지 묻는다. 먼저 유럽의 동굴에 그려진 선사시대 벽화들. 이 중 스페인 북부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처음 발견됐을 당시 조작했을 것으로 의심받았을 만큼 묘사가 매우 세밀하다. 1만3000여 년 전 선사시대 인류가 그린 것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작품이 훌륭하다는 의미다.

그렇다면 왜 인간은 '재현하는 행위'와 '재현의 성공'을 즐겼을까. 그리고 어떻게 이미지를 재현하는 능력을 갖췄고, 재현의 요령은 어떻게 터득했을까. 해답을 찾기 위해 저자는 '신경심리학 모델'을 제시한다. 결론은 '구석기시대 화가들은 주위 세계를 관찰하고 그리지 않았다. 눈동자 뒤편에서 떠오른 이미지를 동굴 벽에 옮겼다. 그들은 정신이상 상태에서 보았던 것을 보여주었다'(50쪽)는 것. 이는 샤머니즘과 잘 어울리는 개념이기도 하다.

	'리아체 청동상'(A상)의 일부. 기원전 450년 무렵. 팔과 손에 섬세한 혈관이 도드라져 있다. 출처 Christian Mushenko

저자는 그림과 조각으로 표현된 인간의 몸이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는 점을 거론한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원전 450년께 그리스에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리아체 청동상'이다. 이 청동상은 팔과 손 위로 불거진 혈관까지 살아 굼틀대는 것처럼 정교하게 묘사해 오늘날의 기술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경지라고 일컬어졌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관찰하면 '완벽한 사실주의라는 첫인상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현실보다 기하학적 대칭성에 더 충실하다 보니 다리는 상체보다 너무 길어졌고, 가슴 한가운데 깊게 팬 홈도 어색하다. 요약하면 인체를 과장해서 보여주는 사례다.

구석기시대 인류는 '빌렌도르프 비너스'처럼 여성의 신체에서 가장 중요한 가슴과 골반 주위를 지나치게 부각했다. 바티칸 시스티나성당 천장화 속 남자는 '너무 우람해서 오늘날 최고의 보디빌더조차 그 옆에 서면 왜소하게 보일 지경'이다. 이러한 과장법은 인간의 두뇌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사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인식한 데 따른 것으로 저자는 설명한다.

'인간 중의 신' 알렉산더 대왕 이미지에 관한 대목도 흥미롭다. 알렉산더의 독특한 이미지와 용모가 어릴 때부터 '준비'됐고, '정해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권력의 기술'이 아닌 '예술의 힘'에 의해 알렉산더의 이미지가 제작되고 계속 퍼졌고, 이는 그의 성공을 크게 뒷받침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