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이 멸망하고 원 왕조가 시작하던 시기의 중국 화가 전선(1235~?)이 그린 '부옥산거도'. 자신이 은거한 오흥의 풍경을 그렸다.

- 남송의 화가 전선은
- 나라가 망한 뒤 원대 회화사에
- '은거의 시대'를 열었다

- 송 이전 시대의 기법으로
- 회귀한 이 그림은
- 평범해 보이는 구도 속에
- 고도의 시각적 비밀을 품고 있다

전선(錢選, 1235∼?)은 명분을 지켰고 조맹부는 명분에 집착하지 않았다. 남송이 망하고 몽골이 세운 원 왕조가 시작되었을 때다. 원나라는 한족을 철저히 억압하고 관리로 등용될 기회조차 박탈했다. 그러나 명망 있는 학자들에게는 출사를 권유하며 회유책을 폈다. 조맹부는 송 왕조의 종실 출신이었지만 회유를 받아들여 원의 조정에 출사한다. 그에게는 문화의 지속이 더 중요했다. 그러나 조맹부의 스승인 전선은 출사를 거부하였다. 스승과 제자는 서로의 길이 달랐다. 하지만 평생 미학적 동지 관계를 유지했다.

유민(遺民; 망국의 남겨진 신민) 화가들 가운데 유명한 정사초(鄭思肖)는 송나라가 망하자 앉거나 누울 때는 항상 남쪽을 향했다고 한다. 스스로 호를 소남(所南)이라 하여 남송에 대한 지조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떤 이가 난초를 그릴 때 흙을 그리지 않는 이유를 묻자 "땅을 오랑캐들이 다 빼앗아갔소"라고 대답하였다. 정사초의 비장함과는 달리 전선은 고요한 내부로의 망명을 보여준다. 전선은 은거하여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낸다. 그래서 그런지 그가 언제 어떻게 죽었는지에 관한 정확한 기록이 없다. 그는 원대 회화사에 은거의 시대를 열었다.

■망국 송의 미학을 극복하다

'부옥산거도'는 그가 은거한 오흥(吳興)의 풍경이다. 오흥은 태호(太湖) 남안에 위치한 호수의 고장이다. 긴 화면에는 호수에 둘러싸인 세 개의 섬이 수평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봉래, 방장, 영주의 세 섬으로 이루어졌다는 신선들의 세계를 꿈꾸고 있는 것일까? 신선 판타지를 벗어나면 너무나 평범해 보이는 이 구도 안에 사실은 고도의 시각적 비밀이 감추어져 있다. 우선 거룻배 한 척을 빌릴 수 있다면 그림 속으로 천천히 노를 저어가 보자. 이때 우리의 시선은 이중적이 되리라. 실제 풍경과 물에 반영된 풍경, 그 분열과 융합 사이로 배는 나아간다.

	희지관아도

바위와 산들은 각이 진 기하학적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데 화가는 여러 차례 준(皴; 바위에 주름선)과 찰(擦; 비비기)을 하였고, 나무들은 청록으로 담채를 하여 파스텔화를 보는 듯하다. 흔히 시는 당(唐)에서 다했고, 회화는 송(宋)에서 끝났다고 한다. 송나라의 회화는 산수화의 정점이다. 이성과 곽희(이곽파), 마원과 하규(마하파) 등이 창조한 그 장엄하고 신비로운 절정의 수묵산수화에 비하자면 '부옥산거도'의 채색과 형태는 왠지 좀 유치해 보인다, 마치 이발소그림처럼. 그러나 그것은 기교의 문제가 아니라 미학적 관점의 차이다. 실제로 '부옥산거도'에 대한 평가는 320여 개나 되는 감상자들의 인장이 잘 웅변하고 있다. 전선은 망국 송의 미학을 극복하고자 송 이전의 고졸(古拙)한 청록산수 양식을 의도적으로 선택한다. 전선의 '희지관아도(羲之觀鵝圖; 왕희지가 거위를 보고 있는 그림)'는 용필(用筆)의 기발하고 과장된 멋보다는 단정한 선으로 윤곽을 그리고 그 안쪽에 채색을 하는 구륵(鉤勒)법의 청록산수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거룻배는 거울 같은 호수를 가르며 화면 오른쪽으로부터 들어간다. 먼저 이 은거지의 관문인 작은 섬이 뱃전을 지나간다. 우리는 이 작은 섬의 춤추는 듯한 나무들을 눈여겨 보아둘 필요가 있다. 암초들을 조심하면서 노를 저어가면 가운데의 섬에 이르게 되는데, 이곳이 풍경의 내부다. 섬의 해안선을 따라 들어가면 기이한 내부를 만나게 된다. 호수가 품고 있는 섬, 다시 그 섬의 내부에 호수가 있고 그 호수 속에 다시 작은 섬이 있다. 그리고 은자의 집이 있다. 은자의 망명지는 비밀스러운 미로처럼 겹겹의 내밀성으로 싸여있다. 섬 속의 섬으로 이어지는 다리가 있고 은자가 조용히 다리를 건너고 있는데, 그 풍경이 마치 마음의 심층을 건너는 명상처럼 적요하다.

은거지는 숲과 언덕, 그리고 입구의 암초와 섬에 가려져서 물길의 시선으로부터 은폐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 은자의 거주지를 보기 위해서는 시점을 좀 들어 올려야 한다. 첫째 섬을 지날 때 우리의 시선이 수면의 높이와 거의 같았다면 이제 우리의 거룻배는 수면 위로 조금씩 떠올라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 섬에 이를 때 배는 드디어 하늘을 난다. 우리의 시선은 허공에 있고 이제 산의 내부가 들여다보인다. 산봉우리 사이에 여백은 작은 호수 같다. 우리의 시선과 더불어 호수도 떠오른 것일까? 화면을 수평으로 가로지르는 거룻배 여행은 어느덧 높이를 품은 사선, 배가 하늘로 천천히 부상하는 환상적인 여행이 되었다. 이는 물에 비친 풍경이 이중적으로 반영되었기 때문일까? 물에 비친 풍경은 높은 산일수록 뱃전에 가깝다. 뱃전에 밀려오는 산봉우리를 내려다볼 때 배는 산 위로 실감나게 떠오르는 것이다. 같은 오흥 사람이었던 조맹부는 '오흥산수청원도기(吳興山水淸遠圖記)'에서 오흥의 수변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봄가을 좋은 날/ 거룻배를 타고 성남으로 거슬러 오르면/ 뭇 산이 배를 둘러싸는데/ 마치 비취옥을 깎은 것이/ 물 위의 허공에 떠 있는 듯하여/ 배와 함께 내려다보고 올려다본다." 실제 풍경과 물에 비친 풍경을 보는 이중적 시선(내려다보고 올려다봄)이 잘 드러나고 있다. 아마 '부옥(浮玉)'이란 지명의 내력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수평으로 배열한 원근법

이 그림에 숨겨진 시각적 비밀은 또 있다. 뱃전으로 밀려오는 봉우리에 시선을 뺏겨 그냥 스쳐갔던 나무들이 수상하다. 나무들이 오른쪽에서부터 왼쪽으로 가면서 점점 작아지고 있음을 눈치 챘는가. 첫째 섬의 춤추는 듯한 나무들은 가장 커서 작은 가지까지 상세하게 보인다. 둘째 섬의 오른편은 첫째 섬처럼 나무가 크고 상세하게 그려졌지만 왼쪽 은거지를 둘러싸고는 나무들은 현저히 작아진다. 셋째 섬에 이르러서는 개체의 구분이 힘들 정도로 작아져 아예 하나의 숲으로 인지될 정도다. 이는 나무를 보는 화가의 숨은 시점이 오른쪽 끝에 있음을 말해준다. 오른쪽 끝에서 보면 첫째 섬은 근경, 둘째 섬은 중경, 셋째 섬은 원경이 되는 셈인데, 이러한 3단의 배치는 주로 세로로 긴 축(軸)에 그려진다. '부옥산거도'의 수평 배열 속에 수직의 구도가 숨어 있는 셈이다.

화가의 시선은 오른쪽 끝에서 조망하기도 하고, 배를 타고 흐르며 올려다보고 내려다보기도 한다. 그야말로 '흩어진 시점'(산점투시)이며 '흐르는 시선'이 하나의 그림 속에 통합되어 있다. 이는 의도적인 시점의 전략이 아니라 자연의 리듬과 교감과는 과정을 통해 저절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누가 보는가? 화가인가, 자연인가? 화가는 스스로 쓴 제화시(오른쪽 상단)에서 우리를 유혹한다.



저 남산 봉우리를 보라.

흰 구름 어디론가 가벼이 떠가는데

그 아래 은거한 사람

휘파람으로 노래 부르며 세월을 잊네.

총총하게 선 바위 맑은 물에 비치고

아름다운 나무들 향기 담담하여라.

[…]

흥이 나 오현금을 타니

세속의 먼지가 모두 끊어지네.

은거로의 초대를 어찌 족히 말하리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