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악!"

깜짝 놀랐다. "이건 나잖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 낯선 음성파일을 발견했다. 한 시간 삼십 분짜리 음성파일을 틀어보니, 얼마 전 문화계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 가졌던 좋은 술자리(라고 나는 생각했던)가 고스란히 녹음돼 있었다. 일부러 내가 녹음한 기억은 없다. 그렇다면, 우연히 뭔가 잘못 눌러 나도 모르게 음성녹음 기능이 돌아간 것 같다. '셀프 도청'이라 해야 하나.

들어보니 가관이었다, 술자리에서 서서히 망가지는 내 모습은.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듣는 척 혼자 떠들고, 신중한 척 마구 얘기하고…. 주워들은 정보를 마치 자기 지식인 것처럼 늘어놓는 것까진 그렇다 치자. 자기보다 훨씬 훌륭하게 살아온 이를 험하게 말하고, 결코 욕해선 안 되는 사람(물론 그 자리에 없는)까지 끌어들여 말의 진흙탕에 빠뜨리는 내 모습 앞에선 그만 질리고 부끄러워 나 자신이 싫어졌다.

더는 이러지 말자! '타인(他人)은 지옥이다'라는 말이 있는 줄만 알았지 내가 남에게 지옥인 줄 미처 몰랐다. 그 뒤로 조심했다. 술자리에서 호흡 중심을 입이 아니라 저 아래 단전 근처에 두고자 애썼다. 가만히 듣는 재미를 느끼려 했다. 이런 노력은 때로 성공하고 때로 실패했는데, 마음먹은 대로 잘 된 날은 자리도 재미있고, 탁한 이야기를 내질렀을 때보다 훨씬 충만한 느낌을 받은 건 확실하다.

'셀프 도청' 파일을 우연히 듣고 놀란 직후였다. 동화작가 두 분과 저녁밥을 먹게 됐다. 조용조용 이어지던 이야기가 기분 좋게 깊어진 끝에 여성 동화작가 한 분의 취미가 '가곡'이란 걸 알게 됐다. 70세가 넘었지만, 그가 부르는 가곡은 고왔다. 장소가 부산 아동문학인들 아지트인 방파제횟집의 독립된 방이었으므로 고즈넉했다.

어릴 적부터 노래했고, 젊은 시절 교사가 되어서는 제자들과 함께 노래 불렀고, 은퇴한 뒤로는 줄곧 합창단에서 노래한 그의 가곡 솜씨는 취미라기보다 특기였다. 가만히 부르는 노래가 이렇게 좋은 걸 어쩌다 잊었던 걸까. 함께 자리한 중년의 여성 동화작가와 나, 이렇게 두 명뿐인 청중은 듣고, 조심스레 추임새를 넣고, 살짝이 따라부르며 이 작은 독주회가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이날도 내가 정신 못 차리고 술에 먹히고, 떠들고, 탁한 이야기를 꺼냈다면 이렇게 마음이 가득 차는 체험을 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니 아찔하게 부끄럽다. 거듭 생각해도, 풍류를 즐기고 미(美)를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생활의 최고봉 가운데 한 봉우리는 직접 해보고 몸소 몸을 담가보는 데 있다.

그렇지만 이 도시에서 가만히 노래할 공간과 시간이 너무 적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도심에서 작게라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부터 받게 되기에 십상이니 자제해야 한다. 자제하지 않아도, 수많은 도심 점포에서 내내 터져 나오는 강한 음악 탓에 엄두를 못 낸다. 그러니 가만히 부르는 노래를 들을 기회도 드물다.

그러던 중 내게 일어난 술자리 '셀프 도청' 음성파일 사건을 계기로 나 자신의 볼륨을 낮춰봤더니, 가만히 부르는 남의 노래가 들려왔다. 마음이 촉촉해졌다. 가만히 부르는 노래가 있는 곳을 찾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