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정조 때인 1791년 유둣날 천수경의 집 송석원에서 열린 시모임을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46세의 김홍도가 그렸다.

- 조선 정조 때 천수경의 집 송석원서
- 중인계층 시인들의 글짓기 모임
- 김홍도가 간결하고 운치있게 묘사

- 정적인 달빛과 동적인 시냇물 사이
- 숲으로 둘러싸인 여백 속의 9인
- 신분적 한계와 좌절, 시대와 불화
- 울분의 詩心을 토해내고 있는 듯

우선 술에 취하고 달빛에 취하고 마침내 시에 취할 것이다. 그곳에 우리도 초대받고 싶다.

유월이라 유둣날, 마음 맞는 벗들과 함께 옥계(玉溪)에서 멱을 감고 솔바람 쐬며 달빛 속을 거닐면서 시를 읊조리고 싶다. 송석원(松石園), 시가 흐르는 여름날 밤으로 사립문을 슬쩍 밀고 들어가 보자, 저 조선의 위대한 화가 김홍도의 붓끝을 따라서.

조선의 르네상스라는 정조 때다. 규장각 서리들인 장혼, 김낙서, 박윤묵 그리고 조수삼, 차좌일 등이 마을 훈장 천수경의 집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시인이다. 조선시대에 글줄이나 읽었다는 것은 곧 시를 쓸 줄 안다는 것을 의미했다. 조선은 시 짓기로 관리를 뽑던 희한하고도 경이로운 나라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것은 양반에게만 허용된 문치의 고상한 문화였다. 글을 아는, 그 중에서도 시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서얼과 중인에게 조선은 차라리 잔인한 질곡이었다. 천수경의 집으로 모여든 자들은 그 질곡을 차고 있는 중인 문사들이었다.

옥류천이 흐르는 천수경의 집 뒤로는 울창한 소나무 숲과 몇 길이나 되는 큰 바위가 있어 천수경은 스스로 호를 송석이라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곳을 송석원이라 했다. 송석원에 모인 사람들은 차를 다리고, 둘러앉아 시를 짓고, 술을 마셨다. 마시다 취하면 달빛에 울부짖기도 하였으리라. 시대와 불화하는 재능들은 언제나 달빛에 젖는다. 그늘의 빛, 달빛에 젖은 차좌일의 탄식은 지금도 듣는 이의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밝은 달밤에 배를 띄우고 술에 취하였다. 왼손으로는 술항아리를 두드리고 오른손으로는 뱃전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니, 그 소리가 하늘 끝에까지 이르렀다.… 울면서 부르짖기를 "세세생생에 이 나라 사람으로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노라."고 하였다.

■김홍도 46세 때의 그림

이인문이 그린 '송석원시사회도'. 송석원 일대 전경을 보여준다.

송석원의 시모임을 '송석원시사(松石園詩社)' 혹은 옥계시사(玉溪詩社)라 한다. 송석원시사는 정기적 시모임을 갖고 거기서 주고받은 시를 기록한 시축(詩軸)이나 시첩(詩帖)을 만들었으니 말하자면 시동인인 셈이다. 불우한 시인들의 이 조촐한 동인은 훗날 위항문학(委巷文學; 중인 중심의 한문학)이라는 도도한 물결을 이루는 문학운동이 된다. 그리하여 문인들치고 송석원에 이름 석 자를 두지 못하면 부끄럽게 여길 정도가 된다. 당시 송석원 일대 전경은 이인문이 그린 '송석원시사회도'에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1791년 유둣날 보름달 아래 모임은 달빛만큼 호젓하다. 그날 송석원의 밤 모임을 그린 '송석원시사야연도'는 김홍도 46세 때 작품이다. 과감한 생략과 초점화를 통해 사건을 압축하여 풍경을 만들어내는 솜씨는 가히 압권이다. 김홍도의 망원렌즈가 포착한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자. 사립문 앞 큰 버드나무는 버드나무를 좋아했던 시인 도연명을 환기한다. 이곳이 시의 나라임을 표시하는 것일까? 고즈넉한 숲 속 빈터에 8명의 동인이 벌써 자리 잡고 앉았다. 등잔불과 소반, 술병이 가운데 놓였다. 몽환적인 달빛, 신비로운 여백이 그들을 둘러싼다. 모임이 제법 이슥하고 술이 몇 순배 돌았을까, 중앙의 두 사람은 갓을 벗었고 제일 오른쪽 사람은 아예 반쯤 누웠다. 한 사람은 이제 막 들어선다. 늦게 도착한 한 사람이 화면의 고요함에 미묘한 움직임을 부여한다. 그는 정지와 움직임, 몽환과 현실의 경계를 막 가로지르고 있다.

왼쪽 아래 '김씨운림서소(金氏雲林書所)'라고 적힌 것을 보면 이곳은 송석원 큰 바위가 있는 곳으로 가기 전 김씨 성을 가진 주인의 초당 근처인 모양이다. (김홍도 자신의 집이라는 설도 있다.) 사방은 마치 달빛의 마법에 걸린 듯하다. 김홍도의 달빛은 드러내면서 감추고, 생략하면서 클로즈업한다. 달빛에 젖는 몽롱한 먹의 농담(濃淡)은 풍경의 내면이 품은 시심(詩心)을 길어 올린다.

유월의 한여름 밤, 밤벌레 소리와 시인들의 시 읊조리는 소리가 금세 손에 잡힐 듯하다. 젖은 공기 속으로 울려 퍼지는 시의 리듬처럼 몽롱하게 드러났다가 다시 여백 속으로 잠겨 들곤 하는 나무 잎사귀의 미세하고 무성한 파동의 촉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뒷날 옥계청유첩(玉溪淸遊帖) 속에 들어 있던 이 그림을 본 마성린이란 선비는 그림에 이렇게 제문을 써넣고 있다. "유월 무더운 밤에 구름과 달이 아스라하니, 붓끝의 조화가 사람을 놀라게 하여 혼몽하게 하는구나."

■화가가 클로즈업한 운림서소

아래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위로는 달빛이 흐른다. 그 가운데, 화가가 클로즈업한 '운림서소'에는 시가 흐른다. 이곳은 둘러싼 여백에 의해 세속의 세상과 분리된다. 뭔가 다른 세상인 모양이다. 이러한 분리는 시선의 차이에 의해 더욱 신비롭게 연출된다. 화면 왼쪽 시냇물 쪽을 보는 시선과 오른쪽 '운림서소'를 보는 시선이 서로 다르다. 여백을 머금고 시냇물이 흘러오는 화면 왼쪽은 수평적인 평원의 시선이다. 반면, 9명의 동인이 있는 '운림서소'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선으로 그려졌다. 그리하여 '운림서소'는 마치 주변 풍경으로부터 달빛을 타고 떠오르고 있는 느낌을 준다.

화가는 이러한 효과를 의식했을까? 그는 달을 낮게 배치해 부상하는 '운림서소'가 벌써 달의 경계에 이른 것 같아 보이게 한다. 원형의 달과 조응하며 '운림서소'도 원형의 세계를 이룬다. 술이 있고 시가 있고 또 달이 있으니 이는 적선(謫仙) 이태백의 세계가 분명하다. 하늘에서 쫓겨난 신선의 세계, 동시에 그곳은 땅에서 쫓겨난 중인들의 중간계다.

그의 스승 강세황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은 한결같이 김홍도의 풍모가 신선 같았다 한다. 김홍도도 틀림없이 중간계의 적선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달의 세상을 이렇게 황홀하게 포착할 수 있겠는가. 이 불세출의 화가에 매혹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마는, 김홍도도 중인이라는 신분을 넘어서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그 역시 중간계 사람이다. 그 중간계의 정취를 차좌일의 시가 얼핏 보여준다.



봄바람 부는 오늘 함께 모이니

송석원이 그윽하구나.

좌중에 속된 객이 없음을 즐거워하니

경외(境外)에 사람이 있는 줄 그 누가 알리.

풍성한 술잔의 정취는 즐김직하고

질탕히 스스로 산수의 음을 이룬다.

재물의 대화는 잊은 지 오래니

어찌 내 마음을 움직일 수 있으리.



아마 봄 모임에서 쓴 시인 모양이다. 이 고고한 탈속의 운치에도 어디선가 비애의 정조가 스며든다. "그 누가 알리"라는 말에 담긴 반어적인 슬픈 욕망을 어찌 하리. 조선 후기 팽창하던 중인계층의 꿈과 욕망과 좌절이 송석원시사에, 그것을 그린 김홍도의 '송석원시사야연도'에 안개처럼 스멀거린다. 도저한 시정(詩情)과 아련한 비애가 뒤섞이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