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겨울을 지나 봄에 닿을 때쯤. 도심에 부는 칼바람은 주머니 속에 손을 찔러 넣게 한다. 그 바람은 검게 분다. 그리고 거리뿐만 아니라 책장 속에서도 분다. 겨울을 지나온 3월이 봄이 아닌 까닭. 우리는 그 까닭을 한 권의 시집에서 찾을 수 있다.

입 속의 검은 잎은 기형도 시인의 유고(遺稿) 시집이자 그의 유일한 시집이다. 경기도 광명에서 유년기를 보낸 그는 신문사 재직 시절 작품을 발표하며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의 시구는 1980년대를 관통한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 41쪽)

공장의 매연과 음습한 기운이 만들어낸 안개. 안개는 그 시대를 뒤덮는 비극이다. 당시를 살아낸 기형도는 비극을 밀어내지 않는다. 풍경 속 사물과 인물을 시구에 받아낸다. 안갯속에서 여공은 겁탈당하고 취객은 동사한다. 하지만 특별할 것은 없다. 안개는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걷힌다. 여공은 작업복 틈으로 아름다움을 잃지 않으며, 순한 아이들은 공장에 가기 위해 성장한다.

'그러나 서울은 좋은 곳입니다. 사람들에게 분노를 가르쳐주니까요.' (조치원, 19쪽)

음울한 색감에 노출된 기형도 특유의 표현은 시대를 자체의 풍경에 중첩시킨다. 가느다란 비가 내리는 거리에 대한 묘사는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 명암 대비가 강하다. 1988년 올림픽 그리고 탈주범 지강헌. 부조리한 시대는 기형도의 시를 타고 흐른다.

'범인은 휴일이라는 노래를 틀고 큰 소리로 따라 부르며 자신의 목을 긴 유리조각으로 그었다.' (가는 비 온다, 50쪽)

신문에 날 정도로 큰 사건에 충격이 상당하였을 것이다.

5·18은 충격이고 부채(負債)다. 어둠으로 가득 찬 대지를 지나면 거리는 죽은 자들로 넘쳤다. 고함을 치고 싶은 혀는 독재 아래 죽었다. 수많은 입속의 죽은 혀는 검은 잎이 된다. 이 검음은 비단 1980년대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미완의 민주화를 거쳐 광폭한 자본으로 뒤틀린 오늘은 1980년대를 찍어낸 데칼코마니와 같다. 삼풍백화점이, 성수대교가, 용산이, 천안함이 그리고 세월호가 그랬다. 시대의 징후를 먹고 자란 입속의 검은 잎은 더욱 무성하다.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 속의 검은 입, 59쪽)

기형도 시인은 필름 카메라로 자화상을 남겼다. 광주 망월동 묘역을 다녀온 직후다. 그는 렌즈 앞에 서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다. 찌푸린 주름 사이의 그림자가 몹시도 깊고 검다.

'기형도는 1960년 경기도 연평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1989년 3월 7일 새벽 3시30분경, 종로 2가 부근의 한 극장 안에서 죽었다.' (영원히 닫힌 빈방의 체험, 한 젊은 시인을 위한 진혼가 중, 155쪽)

영화감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