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발표되는 소설들을 보면 거침없는 상상력, 특이한 인물들이 등장하는 독특한 스타일의 소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정유정, 김애란 등의 작품이 이 경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데 그들이 만들어낸 이야기는 읽는 즉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래서인지 그들의 작품이 영화화된다는 소식을 자주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나는 요즘 들어 이런 소설을 읽는 것이 좀 불편해졌다. 이 재미있는 이야기들은 '읽기'에 의미를 두는 것이 아닌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글이 쓰인 것 같아서이다. 읽기가 아닌 보는 것이 중요해졌다면 우리가 소설을 읽을 필요가 있을까? 대체 이 시대의 소설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이때 떠오른 작가가 바로 조갑상이다. 그의 첫 번째 소설집 다시 시작하는 끝에 실린 17편의 소설은 기발하거나 독창적이지는 않지만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몇 편의 소설을 제외하고 대부분 고학력자에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중년 남성으로, 의도치 않게 어떤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그리고 소설 전반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고 있는 공간, '부산'은 단지 배경으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소설의 또 다른 주인공이다.

'다시 시작하는 끝'에 실린 중편 '은경동 86번지'는 조갑상 소설을 말하는 데 있어 대표작품이라고 할 수 있어 보인다. 형사 문영호는 자신이 뒤쫓는 범인 이원재가 은경동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십여 년 만에 고향 부산으로 온다.

부산역, 은경동, 신평, 남포동으로 이어지는 문영호의 여정을 뒤따르다 보면 1980년대 당시 부산 공간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래 철도 담벽을 따라 판자촌이 들어섰던 곳이었는데 그가 고등학교에 입학했을 땐가 엄청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철거되었다. 철도 접경지역과 언덕바지의 불량 주택이 집중적인 재개발 대상이었는데, 그가 살던 동네도 계획선이 어디로 그어지느냐에 따라서 희비가 엇갈렸다'(251쪽).

실제로 부산의 1980년대에는 도시 재개발로 산동네 집들이 강제철거 되는 등 그곳에 살던 서민이 고통을 받은 경우가 많았다. 소설에서는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해 드러내 말하지 않지만, 가난한 산동네 '은경동'(가상공간이나 부산 동구 쪽으로 짐작할 수 있다)의 공간의 변화를 통해 그곳에 살았던 사람들의 비루한 삶을 추적하게 한다. 그리고 알게 된다. 공간의 문제가 (부산)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 시작하는 끝'에 실린 대부분 작품은 흥미진진함도, 확실한 결말도 없다.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 공간에 대한 긴 묘사, 고단한 삶으로 극단적 상황을 선택하는 인물들, 그리고 이들을 섣불리 위로하지 않는 차가운 시선이 존재한다.

그것은 독자에게 당장 재미를 주진 못한다. 하지만 '소설'의 의미를 생각하게 한다.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는 것(공간), 스쳐 지나가는 것(풍경), 여기 살고 있는 사람들, 우리가 다 알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소한 것들을 붙잡아 쓰는 것, 그것 또한 소설의 임무라고 말이다.

현재 절판 중인 '다시 시작하는 끝'이 재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25년 만에 다시 발간되는 이 책의 출간이 기다려지는 봄날이다.

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