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말글 다채로운 활용과 압축 강조

시를 쓰는 사람이 많다. 한 해에 발표되는 시가 2만 편이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시단에는 여러 통로로 새로운 인원이 줄곧 들어선다.

이런 시단에서 한 가지 현상을 접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시를 '쓰는' 데 관심이 그나마 높지만, 시 자체에 대해서는 공부나 고민을 별로 하지 않는 현상이다. 시란 무엇인지, 좋은 시가 갖출 요건, 나쁜 시가 나쁜 이유는 뭔지… 진지하게 따지고 익히는 이는 자주 볼 수 없다. 이런 풍토는 시와 시인은 늘어도 독자는 줄고, 문학적 성취·숙성과 상관없이 나이 많다는 이유로 '원로' 호칭을 갖다 쓰는 등의 어지러운 상황을 부르는 데 어느 정도 원인이 됐다.

박태일(경남대 국어국문학과·사진) 교수가 펴낸 문학비평집 '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케포이북스)은 이런 상황에서 돌직구처럼 날아들었다. 박 교수는 시인이며 깐깐한 문학평론가, 치열한 문학연구자로 꼽힌다. 그렇다고 이 책을 그가 쓴소리와 깐깐한 지적만으로 채운 건 아니다.

이 책을 '돌직구'라 하는 것은 저자가 에둘러가지 않고 '좋은 시와 나쁜 시' '시의 조건, 시인의 조건' '시인이 지녀야 할 네 가지 덕목' 등 제목을 단 글로 시 자체에 대해 따지고 제시하기 때문이다.

'시를 쓰면 다 시인인가. 이른바 '질 떨어지는' 시를 내놓은 이들에 대한 비아냥이다. 그런데 답은 그렇다. 시를 쓰면 다 시인이다. 좋은 시를 쓰는 시인인가 그렇지 못한 시인이냐는 판단 주체의 가변적인 평가가 남았을 따름이다. 모든 시인이 죄 좋은 시인이 될 까닭은 없다. 마찬가지로 모든 시가 다 문학사를 겨냥하고 명작을 겨냥할 까닭은 더욱 없다. 문학 관습의 최소 요구 조건 위에서 더욱 많은 이들이 시를 누릴 수 있는 사회적 배려는 문화 민주화라는 쪽에서 필수적인 일이다.'(24쪽) 이 책에 담은 저자의 마음을 어느 정도 담아낸 문장이다.

박 교수는 '좋은 시와 나쁜 시'라는 글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내놓는다. 끊임없이 시와, 말글과 다투는 시인의 태도가 중요하고 겨레 말글을 진폭이 넓게 다채롭게 활용하는 것, 압축과 생략으로 긴밀하면서도 다르게 고쳐쓰기 어려운 경지의 표현, 손쉬운 고정관념에서 매몰차게 등 돌리고 서려는 작품 내용 등 다섯 가지다.

'시의 길손이 지닐 네 가지 덕목'으로는 겨레 말글에 대한 이바지, 웃음 창발, 평균적인 문학에 대한 거부, 이타적인 정신을 꼽는다. '웃음 창발'은 낯설지만 매우 매력적인 덕목이라 앞으로 논의가 더 필요해 보인다. '장소시의 발견과 창작'이란 글은 특히 인상 깊다. 해운대 오륙도 몰운대 등 장소에 대해 시를 쓰는 시인이 늘고 있는데, 참고될 만하다. '백석과 장소시학'이란 단원도 뜻깊다.

본격 이론서는 아니지만, 시 자체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글모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