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영화감독 빔 벤더스가 연출한 '파리, 텍사스(1984)'는 황량하게 펼쳐진 사막의 풍경 속으로 주인공 트레비스가 걸어오며 시작된다. 메마른 풍경 위로 흐르는 라이 쿠더의 기타 연주와 함께 방랑자 트레비스에게 새겨진 상실과 부재의 시간은 관객에게 넌지시 닿는다. 붉고 푸르게 산란하는 빛 속에서 드러나는 트레비스의 뒷모습만큼이나 짙게 너울거리는 영화 '파리, 텍사스'.

빔 벤더스의 한번은,은 이 영화가 주는 잔상과 꼭 닮았다. 이 책은 영화감독인 저자가 찍은 사진과 짤막한 글을 엮은 수필 형식의 사진집이다. 책장을 넘기면 일상의 순간을 묘사한 이야기와 직접 카메라를 통해 촬영한 사진이 펼쳐진다. 이 사진이 영화감독의 것이라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게 다가온다.

일반적으로 영화는 물리적인 시간을 지니고 있다. 이때 1초의 시간은 24장의 정지된 사진들로 만들어진다. 영화 속 움직이는 이미지가 실제로는 정지된 여러 이미지의 연쇄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진은 시간이 정지된 상태이고, 영화는 지속의 상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빔 벤더스는 사진 속 멈추지 않는 시간이 그 일회성과 고유성을 보장하며, 가장 진부하고 단순한 그 순간들 역시 유일무이하고 되돌릴 수 없는 존재라고 말한다. 그리고 사진을 찍는 행위를 통해 시간을 붙잡기보다는, 시간이 멈추지 않고 지속적으로 흐른다는 점을 증명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번은 캘리포니아에서 텍사스까지 차를 타고 달렸다. (…) 셔츠 한 장만 입고 있던 난 끔찍한 추위와 대면해야 했다. 고속도로 다리 아래에선 황량하게 버려진 공동묘지와 마주쳤다."(124쪽) "다음 날 아침 다시 내려앉은 햇살에 묘지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갔다."(130쪽)

짤막한 글과 함께 실려 있는 사진은 서로를 부연하는 기능과 거리를 두고 있다. 직접 경험한 공간과 사물을 억지스럽게 미화하기를 거부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레 그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자극적이거나 인위적인 서사보다는, 풍경에 내려앉은 시간 자체를 고스란히 하나의 이야기로 풀어낸다. 도시의 거리, 황야의 정물 혹은 영화 세트장 같은 실내의 풍경은 빔 벤더스가 말하는 이야기의 주인공이다. 영화처럼 그의 사진은 정지된 상태로 흐르고, 사진처럼 그의 영화는 찰나의 여운으로 남는다.

"한 번은 호주 사막 한가운데에 있는 이 거대한 바위산을 찍기 위해 상당히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그날 하루 종일 에어즈락 주변을 걸었다. 걷는 동안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단지 호텔을 나설 때부터 앞장을 섰던 개 한 마리만이 내내 나를 쫓아다녔다."(342쪽) "같은 날 저녁 나는 에어즈락을 다시 한 번 카메라에 담았다."(352쪽)

'파리, 텍사스' 외에도 '베를린 천사의 시(1987)'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1999)' '피나(2011)'등을 통해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 온 영화감독 빔 벤더스. 그는 책장 전체를 아우르며 자신이 매료된 "특정한 빛, 어떤 얼굴, 어떤 제스쳐, 어떤 풍경, 어떤 기분"을 담아낸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 이르러 말한다. 휘발되는 이미지의 일회성이 아닌 오롯이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순간의 가치를.


▶영화감독. '상(2012)' '재(2013)' '해와 달(2014)' 등 연출. 2013 메이드인부산독립영화제 대상('재')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