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 작가.

세상 살면서 숱한 만남을 경험한다. 맞선 장소에서의 설레는 만남, 접촉 사고로 알게 된 유쾌하지 못한 인연, 학부모로 어울리게 된 낯선 사람 등. 이런 평범한 만남의 방식을 이야기꾼들은 어떻게 그들만의 서사로 풀어내고 있을까.

여기 한 소설집이 있다. 개인적 불행(고통)의 치유 과정과 환경(자연파괴)에 관한 관심을 모두 '만남'이라는 소재 안에서 버무려냈다. 8편의 소설마다 빠짐없이 존재하는 '나'를 둘러싸고 학교폭력, 성폭력, 가족갈등 속에서 숨겨왔던 상처를 고백과 폭로로 드러내는 방식이다. 흥미진진한 전개가 읽는 내내 눈길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부산의 대표적 여류작가 정인이 5년 만에 펴낸 세 번째 소설집 '만남의 방식'은 상처의 발자취를 좇는 집요한 시선을 따라가고 있다. '유서'의 화자 '나'는 하루아침에 아버지를 잃는다. 남겨진 것은 의문투성이 유서 한 장. 낯선 여자 이름과 전 재산을 그녀에게 주라는 유서의 뜻을 따르는 동안 생전 아버지의 놀라운 행적이 속속 밝혀진다. 그녀가 누구인가에 따라 어머니의 수십 년 인생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릴 수 있기에 결론에 도달할 때까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정 작가는 "친정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외며느리인 올케를 위해 한 일들이 밝혀졌다. 장례를 치르는 동안 한 편의 소설이 머릿속에서 지나갔다"고 말했다.

세번째 소실집 '만남의 방식'.

제18회 부산소설문학상 수상작이기도 한 표제작 '만남의 방식'은 불발된 화합에 밀착한 작품이다. 그동안 전혀 왕래가 없던 재일교포 2세 '사촌'이 별안간 한국에 사는 '나'를 찾아오겠다며 연락한다. 처음 만나는 사촌과 술잔을 기울일 생각에 흐뭇해 하던 화자의 기대와 달리 사촌은 통역까지 대동해 완벽한 일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가장 어두운 색채를 지닌 '밤길'은 가슴을 먹먹하게 했다. 학교 폭력의 가해자였던 한 대리운전기사의 딸이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돼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한다는 내용이다. 한밤중 차 안이라는 어둡고 밀폐된 공간 속에서 오직 인물의 대화로만 구성된 팽팽한 긴장감이 일품이다. 작가가 "쓰면서 가장 힘들었다"고 고백한 '해바라기의 비명'은 성폭력을 담고 있다. 다소 수긍하기 힘든 결말이었다는 말에 작가는 "작위적으로 끝을 맺었다는 생각에 발표 뒤에도 꺼림칙했다"며 아쉬워했다.

자신의 소설이 어떻게 읽히기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독자가 내 소설에서 읽는 재미를 느낄 수 있으면 좋겠다. 책장을 다 덮고 난 후 감동과 여운이 한 자락이라도 남아 고달픈 생에 행복과 위로를 건넬 수 있다면 더욱 좋겠다"고 말했다.

14년 전 늦깎이(43세) 데뷔 후 부지런히 글을 쓰고 있는 작가는 "소설은 하나의 질병 같아 안 쓸 수가 없다"며 빨리 장편으로 독자를 만나고 싶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