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치졸하기 짝이 없는 무명의 그림장이는 '죽음을 생각하라'는 외침 속에서, 시대의 요구에 미련하게 충실한 응답을 한 것이다. 그리하여 이 졸렬함으로 인하여 진실을 나타낼 수 있는, 으스스하고 더러운 한 폭의 그림을 남긴 것이다." (165쪽)

치열한 사색의 기록을 담은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에서 고통의 삶을 묵묵히 받아들인 한 재일교포 지식인의 서양미술 체험기이다. 저자는 1951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나 와세다대학 프랑스문학과를 졸업하고 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1970년대 초 재일교포 간첩사건에 연루된 두 형의 구명을 위해 힘든 나날을 겪던 저자는 어느 날 훌쩍 떠난 첫 유럽 여행길에서 명화들과 더불어 깊은 사색의 시간을 보낸다. 저자가 우리 근현대사의 질곡과 순탄치 않았던 가족사를 통감하며 예리한 통찰력으로 바라본 그림들은, 비록 한 개인의 주관적인 느낌과 감상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다가와 마음 깊은 곳까지 요동치게 한다.

미술 순례의 시발점이 된 '캄뷰세스 왕의 재판'(헤럴드 다비드 작, 벨기에 흐로닝헤미술관 소장)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연상한 저자는 이후 프라 안젤리코, 수틴, 고야, 고흐, 레온 보나와 같은 거장들의 작품에서 고난을 짊어진 인간들과 시공을 초월한 교감을 나누게 된다.

"나는 단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이 운명의 형태를 속속들이 지켜보도록 스스로에게 명령해왔을 따름이지만, 그 과정에서 역사와 인간, 민족과 개인, 고향과 유망(流亡) 그리고 고통과 죽음 같은 것들에 대해서 거듭거듭 많은 것을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 온갖 종류의 서양미술에 접하고 그것들과 마음속에서 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내 속에 있던 불분명한 '응어리'가 조금씩 표현의 형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178~179쪽).

저자는 순례를 마치면서 '희망의 공허함보다는 절망의 어리석음을 통감하고 희망과 절망의 틈바구니에서 역사 앞에서 자신에게 부과된 책무를 이행할 뿐'이라고 인고의 세월을 정리하는 소회를 밝힌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고 마주 보는 미술 작품에 솔직한 감정을 이입하는 과정이 진정한 감상이 아닐까 싶다. 삶의 무게를 담은 그림과 마주했을 때 삶이 결코 녹록지 않음을 인식하면서, 작품 속 주인공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지 않았음에 위로받는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아름답고 가치 있으며 자유로운 존재인지 확인하게 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우리 삶에서 그림이, 그리고 미술 감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강조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이 책을 계기로 많은 사람이 미술 작품을 함께하고 서로 공감하는 인연이 되기를 바란다. 지난하고 고단한 일상을 치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도, 모두 우리 자신의 몫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선망하고 추구하는 미학적 삶이 저 너머가 아닌 바로 우리 곁에 있음을 확신할 수 있다.

갤러리이배 대표·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