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단에서 나림 이병주(1921~1992·사진)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국제신보(국제신문의 전신) 주필과 편집국장 출신인 이병주는 마흔네 살 늦깎이로 등단했다. 그는 한 달에 평균 200자 원고지 1000장을 쓰는 초인적인 집필로 '관부연락선' '지리산' '산하' '소설 남로당' '그해 5월' 등 80여 권의 방대한 작품을 남겼다.

하지만 '순수 문학'은 이병주 평가에 인색했다. 일부에서는 이병주의 반공주의적 또는 보수주의적 정치관이 영향을 미쳤다고 분석했다. 정작 이병주는 5·16이 일어난 뒤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는 내용의 논설을 써 2년7개월 복역했다. 일제 강점기와 학병으로 참전, 해방, 6·25, 4·19, 5·16 등 격동의 한국 현대사를 모두 겪은 그의 삶은 언제나 소설에 투영됐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기록이자 문학' 또는 '문학이자 기록'을 향했다.

이병주 22주기를 맞아 그의 삶과 문학 세계를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지난 10일 경남 하동군 이병주문학관에서 열린 '2014 이병주 문학 학술세미나'에 맞춰 김윤식 서울대 명예교수와 김종회 문학평론가가 함께 엮은 소설집 '여사록'(바이북스)이 출간됐다. 여기에는 '여사록' '칸나·X·타나토스' '중랑교' 등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단편 3편이 실렸다.

우선 표제작 '여사록'은 진주농고 교사 시절의 동료들과 30년 만에 만나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에세이와 소설 중간 지점을 달리는 이병주의 문법답게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기 어렵다. 그만큼 이병주는 실제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풀어냈다. 해방 공간 극렬한 좌우 갈등의 축약판이었던 진주농고에서 자신의 신념과 상관없이 이리저리 휩쓸리던 당시의 상황을 보여준다.

'칸나·X·타나토스'는 국제신보 편집국장 겸 주필 시절 이야기다. 진보당 조봉암 사형집행일에 아버지가 돌아가신다. 주필로서 "조봉암은 죽어도 진보 사상은 살아있다"는 지침을 내리는 모습은 5·16 이후 "조국은 없고 산하만 있다"는 논설을 쓴 것과 겹쳐진다. 이병주는 이 소설에서 "어떤 날 또는 어떤 일을 기록하기 위해선 얼음장처럼 차가운 말을 찾아야만 하는 경우가 있다"고 썼다. 언론인 출신으로 기록에 예민한 이병주의 개성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중랑교'는 자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중랑교와 절친 박희영에 관한 글이다.

이병주의 소설에서는 격동의 세월을 살아온 지식인의 모습을 확실하게 느끼고 만끽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