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 친구가 있다. 꼬부라진 글씨체만 보면 울렁증이 생기는 나와 달리 이 친구는 꼬부라진 문장을 보면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진단다. 비록 꼬부라졌으되 단어와 단어 사이, 문장과 문장 사이를 산책하듯 왔다 갔다 하다 보면 꼬부라진 것들이 바로 펴지면서 하나의 길이 생긴다는 게 이 친구의 번역론이다. 특별한 비법도 없다며 타박하지만, 속으로는 번역가라는 직업을 택한 친구를 아주 가끔 부러워한다.

그 능력 많은 친구가 하루는 심각한 목소리로 수화기 너머에서 묻는다. 단기간에 우리말 잘하는 법 없느냐고. 번역을 하면 할수록 꼬부라진 글씨 많이 아는 것보다 우리말 실력에 절망을 느낀다나. 속으로 고소해 하며, 선심 쓰듯 몇 권의 책을 추천하는 것으로 처방을 대신했다. 처방전에 담긴 책 제목은 대략 이렇다. 번역은 반역인가, 번역의 탄생, 번역은 글쓰기다, 번역 예찬, 조르바를 춤추게 하는 글쓰기,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 등.

'번역은 반역인가'는 번역에 관한 책 중 국내에서 가장 큰 반향을 일으킨 책이다. 이 책은 오역과 비문이 가득한 번역서가 활개치는, 동서양 고전 상당수가 번역조차 되지 않은 현실을 가감 없이 비판한다. 번역은 "학문의 민주화, 21세기 지식정보사회의 민주화운동"인데, 그 저변이 확대되지 못함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갓 난 아이부터 영어를 배우는 이상한 세상이지만 외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세계 곳곳의 학문과 정보를 우리말로 옮기는 일은 학문과 정보의 저변을 확대하는 민주화임이 분명하다. '번역 예찬'의 저자 이디스 그로스먼 역시 "보편적이고 계몽된 문명이라는 개념을 형성하는 데 중추적이고 현저한 위치를 차지한다"는 말로 번역이 지식의 확대에 중요한 방편임을 역설한다.

우리말 잘 쓰는 법을 알려달라는 친구에게 힘주어 강조한 책은 '번역의 탄생'과 '번역은 글쓰기다'였다. '번역의 탄생'의 저자 이희재는 "번역을 하면서 나는 한국어에 눈떴다"고 말할 정도로 우리말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번역은 글쓰기다'의 저자 이종인은 "좋은 번역가가 되려면 글쓰기에 집중하라"고 말한다. 모든 번역가가 원문을 읽고 똑같은 번역을 하지 않는 것은 저마다의 우리말 실력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말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번역의 질은 하늘과 땅 차이가 될 수 있다.

최근 출간된 '번역자를 위한 우리말 공부'도 꼬부라진 글씨에 자신이 있고, 우리말을 제대로 쓰고자 하는 사람에게 안성맞춤인 책이다. "번역은 외국어 실력에서 시작해 한국어 실력에서 완성된다"는 게 요지다. 우리말로 옮겨진 문장을 독자가 이해하지 못한다면 "원문의 언어인 출발어의 맥락이 잘 옮겨지지 않았거나 독자가 이해하는 언어인 도착어의 맥락이 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번역을 업으로 삼았다면 외국어 실력은 사실상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물론 해당 외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의 역사나 문화 등을 더 많이 아는 대가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어느 번역자가 이 분야 공부를 게을리할까. 하지만 정작 번역의 질을 좌우하는 우리말 실력으로 키우는 일은 손 놓고 있다. "한국어 표현을 더 섬세하게 익히는 일"이야말로 번역자의 미덕인데 말이다. 다시 강조한다. 번역의 기초는 우리말 실력을 쌓는 것이다.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