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사마 야요이의 '튤립을 향한 내 모든 사랑, 영원히 기도하리라'.

"어느 날 캔버스 전체를 무한한 망과 점으로 그리고 있었는데 내 붓은 거의 무의식적으로 캔버스를 넘어 식탁, 바닥, 방 전체를 망과 점으로 뒤덮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빨간 점이 내 손을 뒤덮기 시작했고, 내 손에서부터 점이 번지기 시작해 나는 그 점을 쫓아가기 시작했다. 점들은 계속 번져가면서 나의 손, 몸 등 모든 것을 무섭게 뒤덮기 시작했다."

물방울 무늬 회화, 일명 '땡땡이 그림'으로 유명한 쿠사마 야요이(84)의 자서전 일부다.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영락없는 정신질환(편집적 강박증) 환자이다. 어느 날부터 집안 가득 온통 동그라미 물방울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경험한 그는 여든이 넘은 오늘날까지 물방울 무늬와 함께하고 있다. 현재 그는 자신의 강박증, 집착, 환각증세를 작업으로 연결해 물방울 무늬와 그물망 패턴을 연속적으로 그리면서 '이 시대 최고의 아티스트'로 우뚝 섰다.

쿠사마 야요이의 대규모 전시가 대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국내에서 12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전시는 최신작 30점을 포함해 117점을 1, 2층 전관에서 진행 중이다. 신작 중심으로 마련된 그의 전시는 아시아 최초(일본 제외)로 열리는 것으로, 정신질환과 동양인, 여성이라는 편견을 이겨낸 그가 집대성한 거대하면서도 신비로운 예술세계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 대구미술관에서 펼쳐진다.

'호박'

지난 15일 개관 전날 열린 기자간담회에는 전국에서 몰린 60여 명의 기자로 붐벼 작가의 인기를 가늠하게 했다. 작가를 대신해 참석한 쿠사마 야요이 스튜디오의 오타 히데노리는 "현재 대구를 포함해 일본, 아르헨티나 등 세 곳에서 전시를 개최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에서부터 전 세계로 발전하는 전시가 돼서 많은 사람이 자신의 작품을 즐겨줬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고 말했다. 이어 "작가는 여행이나 음식을 즐기는 등의 취미가 전혀 없다. 지금도 병원과 스튜디오를 오가며 아침부터 밤까지 작품만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근황도 소개했다.

평소 접해 왔던 회화 외에 '영원한 삶'을 꿈꾸는 작가의 작업개념을 표방한 설치작품, 조각, 관람객 참여를 유도하는 인터렉티브 작품 등으로 전시 공간이 구성됐다. 반복·증식되는 '물방울 무늬' '거울' '전구' 등이 소재다. 전시장에서 처음 마주하는 '점에 대한 강박'은 공간을 가득 채운 거대한 풍선이 주인공이다. 바닥에 놓인 풍선 안으로 들어가면 사방이 거울로 둘러싸여 점무늬가 끝없이 반복되는 무한의 세계가 이어지고, 공중에 매달린 풍선은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움직이고 있다. '단순, 화려, 경쾌'. 이들 세 단어가 자연스럽게 뒤엉켜 오버랩되는 현장이다.

'튤립을 향한 내 모든 사랑, 영원히 기도하리라'라는 공간은 형형색색의 점무늬와 튤립이 황홀하다. 관람객을 압도하는 튤립이 공간을 점령하고, 사방이 흰색인 그곳에서 관람객은 감각을 잃고 현기증마저 인다. 쿠사마는 "나의 점무늬는 내 삶을 빛나게 하는 중요한 의미"라고 했다.

'무한 방, 영혼의 광채' 내부 모습.

'무한 거울방-영혼의 광채'방은 들어서는 순간 경이로움과 공포감이 밀려온다. 한 명씩만 들어갈 수 있는 캄캄한 방 안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조명이 엮어내는 반딧불이와 같은 장관을 바라보면 요술세계에 들어왔다는 착각에 사로잡힌다. 벽과 천장은 거울로 둘러싸여 있고, 바닥에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물이 천장 빛에 반사돼 일렁이면서 수백 개의 전구를 비추는 구조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호박 조각과 커다란 남근을 차곡차곡 쌓아 표현한 '남근 보트'는 해학적이고 은유적이다.

대구미술관 김선희 관장은 "현대미술은 '이해하기 어려운 미술'이라는 편견에서 벗어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예술임을 체험하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1990년대 후반부터 쿠사마와 친분을 쌓았고, 2000년대 중반 일본 모리미술관에서 6년간 재직한 김 관장은 이 전시 후 오는 2015년까지 상하이, 마카오, 타이베이, 뉴델리 등에서 순회전을 열 예정이다. 오는 11월 3일까지. (053)790-3030

대구

'무한 거울 방' 내부 모습. 대구미술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