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강원도 고성군 미산면의 중미산 기슭 동굴에서 점토판 수백점이 발견된다. 점토판에는 새 발자국 형상의 고대문자가 빼곡하게 새겨져 있다. 이 조족문(鳥足文)의 내용은 약 6000~7000년 전 한반도에 존재한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시대의 나라 가부루국의 신화와 역사였다.

우연히 점토판을 발굴하게 된 노(老) 국문학자는 문자의 전모를 알아내기 전까지는 이를 세상에 알리지 않기로 하고 5년 동안 혼자 연구를 진행한다. 마침내 점토판의 비밀을 모두 풀어내기 직전, 금강산 관광을 뒷받침하기 위해 중미산에 저수지 공사가 진행되면서 점토판들이 물에 젖는 바람에 가부루의 신화는 깡그리 사라지고 만다.

이야기가 시작하는 것은 이 시점이다. 스스로 '목수 김씨'라 지칭하며 '나무로 깎은 책벌레 이야기' '서을에 딴스홀을 허하라' '목수, 화가에게 말걸다' 등 재미있는 책, 상상력이 생생한 책들을 펴낸 김진송 씨가 펴낸 가부루의 신화는 우리들을 '그랬음직한' 상상의 세계로 데려다준다.

'김진송의 역사 실험'이라는 부제를 단 '가부루의 신화'에서 저자는 사라져버린 우리 상고사의 신화를 복원하고 거기에서 한민족 문화의 원형을 발굴하기 위해 소설의 형식을 빌려 세상에 나왔다는 인상을 풍긴다. 그러나 소설이 진짜로 관심을 집중하는 주제는 다른 데 있다.

노학자가 해독한 가부루국의 신화는 지식을 독점하려는 지배자의 행태와 지식을 독점하겠다는 지적 권력의 욕망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이 신화는 천지창조부터 인간의 등장에 이르기까지 미끈한 내용과 체계를 갖추고 있지만 또 다른 이야기도 들려주고 있다. 가부루 문자를 독점함으로써 다른 부족들을 지배하겠다는 가부루족의 지적 독재와 바로 그 욕망 때문에 멸망을 맞는 가부루족의 운명이 그것이다.

지식 독점의 욕망은 소설 속 인물들의 행동에서도 다양하게 드러난다. 노학자의 성과를 독점하려는 후진 학자, 비슷한 독점욕이 꿈틀대는 주인공 '나'의 행위 등이다. 신화를 홀로 소유하겠다는 욕망에 휘둘려 결국 점토판을 망실하고 이로 인해 죽음을 맞는 노학자의 모습은 그 절정이다. 신화 속에서나 현대의 현실 속에서나 지식인들의 지적 독재 욕망은 비슷하다. 뭔가 현대사회가 반성해야 할 주제가 여기서 떠오르지 않는가.

이 책의 독자들을 참을 수 없이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과연 가부루 신화의 점토판이 진짜 있었나'하는 점일 것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를 분명히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의 상상력을 극도로 상승시키려는 것 같다.

그러나 꼼꼼히 살펴보면 저자가 '가부루의 역사는 허구'라고 밝혀놓은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는 묻는다. '하지만 허구로 역사를 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