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강남역 여성혐오 살인 사건, 미투운동, 불법촬영·편파수사 항의 혜화역 시위, 장학썬 사건(장자연, 김학의, 버닝썬 사건), 텔레그램 N번방 사건 등의 이슈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차별과 성폭력 문제를 드러냈고, 그 충격과 분노는 많은 여성들을 페미니스트로 각성시켜 페미니즘 대중화, 페미니즘 리부트 현상을 낳았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에 둔감하고 묵인했던 문화와 관행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고 아직 불완전하지만 법과 제도의 변화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남자 현상이나 양궁 국가대표 안산 선수를 향한 공격이 보여주듯 성차별이 있다는 현실 자체를 부정하고 여성을 혐오하는 백래쉬도 거셉니다. 차별과 혐오에 단호하게 대응해야 할 정치권은 표 계산에만 급급해 오히려 이를 젠더 갈등으로 포장해 정치적으로 이용하거나 사안의 민감성을 이유로 침묵을 지킵니다. 공공기관은 ‘여성편향적이다, 남성혐오다’는 항의가 제기되면 아무리 억지 주장이라도 슬그머니 꼬리를 내립니다.

여성 내부에서는 예멘 난민 사태, 숙대 입학 거부 사건처럼 여성의 ‘안전’을 이유로 난민이나 트랜스젠더 같은 소수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면서 오직 ‘생물학적 여성’만이 페미니즘의 주체일 수 있다는, 여성을 정의하는 권력 자체를 질문하고 비판하며 저항해 온 페미니즘의 역사와 이론을 부정하는 반동적 움직임도 표출되었습니다(‘북 위드 유 페니니즘을 읽다’도 성소수자 문제를 다룬 ‘무지개는 더 많은 빛깔을 원한다’라는 책에 대한 방송을 업로드 한 후 페미니즘과 성소수자 인권이 무슨 관계가 있느냐는 항의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댓글로 도배가 되었습니다).

	류제성 부산시감사위원장과 권김현영 작가가 ‘북위드유 페미니즘을 읽다’ 유튜브 방송을 하고 있다.

이처럼 “이제 소수의견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공통상식이 되어야 한다는 요청”이 된 페미니즘 대중화 시대는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 자칫하면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위험과 새로운 길을 찾아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페미니즘이 가야 할 방향은 무엇일까요? <늘 그랬듯이 길을 찾아낼 것이다 - 폭력의 시대를 넘는 페미니즘의 응답>의 저자 권김현영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장학썬 사건, 미투운동처럼 굵직한 이슈들을 분석해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착취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미투운동의 혁명적 의미를 어떻게 윤리-정치적 차원에서도 갱신할 수 있을 것인지, 어떻게 토크니즘(징표적 대표성)을 넘어 성적 차이가 대표될 수 있을지, 어떻게 지배와 비지배, 전쟁과 대립을 당연시하는 남성적 안보관을 대체해 평화로운 공존을 위한 여성주의적 안보기획이 가능한지 묻고 해법을 제시합니다.

1부 ‘극단적으로 유해한 남성들로부터 우리 모두를 구하는 길’은 텔레그램 N번방, 장학썬 사건을 분석함으로써 여성에 대한 폭력, 착취 및 성접대 관행을 가능하게 한 강간 문화가 만들어진 과정을 파헤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텔레그램 N번방 사건에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나는 아니야’, ‘모든 남자가 그런 건 아니야’라고 항변하거나 성적 호기심이 왕성한 10대, 20대의 극히 예외적인 일탈로 간주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저자는 인터넷이 포르노, 불법촬영물과 결합해 폭발적으로 성장해왔음에도 2015년 11월 여성들이 ‘소라넷 폐쇄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직접 행동에 나서 여론을 환기하기 전까지 이를 미처 간파하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규제와 단속을 하지 못한 역사를 추적하고, 디지털 성착취물 ‘관전’ 행위를 여성을 비인간화하고 성적 노예화하는 범죄에 가담하는 행위가 아니라 단순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일로 사소화하는 인식과 문화가 쌓아올린 ‘실패의 총합’이 바로 N번방이었음을 밝혀냅니다.

장학썬 사건을 통해서는 한국 최고위층 남성 권력의 ‘유흥’ 문화가 ‘범죄’ 수준이라는 사실, 여성의 몸을 접대의 매개로 삼아 상납하고 거래하는 관행이 권력을 가진 남성의 ‘주류’ 문화에 뿌리 내려 있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사실, 그럼에도 그들은 법망을 벗어난다는 사실, 여성을 때리고 강간하고 착취하는 남성은 ‘낙오자’들이며 그들의 피해 의식에서 비롯되었다는 널리 퍼진 가설이 틀렸다는 사실이 드러났음을 밝힙니다. 이처럼 자신의 일탈행동을 남성 보편의 행동으로 일반화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범죄를 관행으로, 폭력을 문화로 만들 수 있는 ‘극단적으로 유해’한 남성들로부터 우리 모두를 지키기 위해서는 주류 집단 남성의 성폭력과 성착취 문제와의 전쟁을 포기하지 않아야 하고, 젠더 갈등을 조장하여 주변화된 남성들을 다시 집단으로 모으고, 그들의 불만을 기성세대의 남성이 아니라 여성에게 돌리는 정치적 선동에 유념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부 ‘미투혁명이 돌파한 길, 멈춰 선 길’에서는 미투운동은 성폭력의 사사화, 은폐와 축소, 엄벌주의에 바탕을 둔 가해자의 괴물화와 피해자의 전형화를 해결할 수 있는 조건(소셜네트워크) 속에서 개인이 아니라 집단으로, 피해자의 직접 행동을 통해 말했기 때문에 반성폭력 운동의 오랜 교착을 돌파할 수 있었고, “미투는 상호증언 특유의 형식 속에서, 사법제도 바깥에서, 사회가 무너진 곳에서 만들어진 직접 행동주의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서 혁명의 언어였고, 당사자들에 의해 당사자성을 넘어선 연대의 언어”였으며 “무엇보다도 여성들의 힘을 붇돋우는 말이었다”는 점에서 기존 반성폭력 운동과 질적으로 다르다고 평가합니다.

그리고 미투운동은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 ‘집단으로’ 말함으로써 피해자 없는 범죄, 암수범죄로 구조화된 단단한 조건 하나를 흔들리게 했다는 것만으로도 혁명적 변화라 할 만하고, 페미니즘 대중화의 흐름 속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자신을 성폭력이라는 구조적 문제의 고발자로 생각하게 되어, 가해자 처벌과 피해자 보호를 넘어 위계를 이용한 젠더 기반 폭력의 구조적 조건을 바꾸기를 원하고. ‘안전’이 아닌 ‘권력’을 이야기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렇기에 “미투운동을 여성주의적으로, 급진적 민주주의의 기획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안전보장이 아니라 삶에 대한 민주주의로, 피해자중심주의가 아니라 상호의존적인 인간다움에 기반한 새로운 상식을 구성하는 피해자 합리성으로서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미투운동이 남성들에게 던지는 숙제는 무엇일까요? 젠더 폭력에 분명한 경고와 타격을 가한 미투운동은 되돌릴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사회운동이기에 남성들이 혼란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는 남성 개인 스스로 해결해야 할 문제이고, 이제 남성들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성 역할’은 (실제로 수행된 적도 없고 가능하지도 않은) ‘보호자 남성’이 아니라 ‘스스로를 책임지는 것’이며, 남성 사회의 변화야말로 진정한 미투혁명이라는 여성학자 정희진의 글이 좋은 답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정희진,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투 운동’, 「미투의 정치학」, 107쪽 / 교양인)

마지막 3부 ‘어제의 여성에서 내일의 여성으로 나아가는 길’에서는 ‘여성 대통령’ 박근혜에 대한 글로 시작합니다. “사회적 약자로서의 여성도, 여성이 개인이 되고자 했던 100년간의 투쟁도, 여성의 정치참여를 위한 전략과 기획도, 촛불부터 희망버스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사회연대의 흐름을 만들어냈던 그 많던 여성의 목소리와 새로운 정치적 주체들의 탄생도 모두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버지의 정치적 유산을 잇는 것이 자신의 정치적 목표라고 공언하는 단 한 명의 여성 대통령이다.”

저자가 2013년에 쓴 “‘여성 대통령’은 어떻게 탄생했는가”라는 글의 결론입니다. 7년이 지난 2020년, 저자는, 박근혜가 집권 기간에는 여성의 지적 능력을 향한 불신과 조롱이 담긴 ‘수첩공주’, ‘닭’으로, 탄핵 과정에서는 미용성형에 중독된 ‘미쓰 박’으로 호명되었고, 박근혜와 지지자들도 약자로서의 여성을 내세움으로써 ‘공사 구분을 하지 못하는 여자’가 되어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를 스스로 퇴행시켰고, 여성혐오적 공격이 폭넓게 이루어짐으로써 대중문화에서 현실정치에 이르기까지 널리 퍼진 여성혐오가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지나간 자리에 남겨졌다고 덧붙입니다.

지금 상황은 더 좋지 않아 보입니다. 여성의 과소대표성을 보정하기 위한 여성할당제조차 위협받고 있는 상황입니다. 저자는 정체성 자체를 정치적인 구성물과 조건이 아니라 본질적이며 불변하는 속성으로 이해해 차이를 만들어내는 권력에 도전하기보다 그 차이 자체를 지켜야 할 가치로 만드는 정체성의 정치와 사적 이해관계를 ‘넘어’, “궁극적으로 여성정치의 전망은 여성을 여성이, 남성을 남성이 대표하는 이원체계를 공고화하는 것이 아니라 성차가 현존하는 세계의 경험을 반영하되, 성차의 작동 방식을 끊임없이 의심스러워하는, 어제의 여성에서 출발하여 미래의 여성으로 나아가는 기획을 통해서만 성취될 수 있다.”고 역설합니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성별 분업의 강화, 노동의 저임금화를 가속시켜 보살핌의 계급화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는 동시에, 공사 영역과 근대적 주체 형성에 대한 문제 제기, 도덕성에 대한 새로운 질문들을 포함하는 기획으로서 안보 영역에서 ‘보살핌의 윤리’의 가능성을 살핍니다. 사회적 관계에 관한 사유로서, “불평등한 관계에서 발생하는 폭력과 착취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려는 의지이자 실천”으로서의 ‘모성적 사유’를 보호자 남성과 피보호자 여성이라는 이분법을 해체하려는 여성주의적 기획, 적대적 타자를 설정하여 주체를 구성하고자 하는 근대 남성 중심적 철학의 편향을 고발하려는 탈근대적 기획, 생존을 위한 폭력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공존이라는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려는 평화주의적 기획으로 전유합니다. ‘여자도 군대 가라, 임신, 출산하면 빼 줄게’ 같은 수준 낮은 선동이 아니라 ‘타자와 함께하는 상호주체성’을 위한 희망을 페미니즘을 통해 봅니다.

여러분은 저자가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이후 특히 마음에 새긴 “함께 구시대의 마지막 목격자가 됩시다”는 해시태그에 동참할 준비가 되셨는지요? 이 책의 제목처럼, 페미니즘은 오랜 시간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길을 찾아냈고, 앞으로도 찾아낼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역사와 구체적 현실과 맥락을 파헤치고 보편적이고 당연한 것으로 여겨 온 관념을 뒤집고 해체하는 페미니즘적 사유하기, 글쓰기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자의 막힘없고, 열정적이고 통쾌한 대담을 보시면 받아쓰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것입니다. 이 책과 북 위드 유 방송으로 새로운 길을 찾는 여정에 함께 하시기를 바라며 이만 맺습니다. 류제성 부산시 감사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