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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30> 신라 오악 중 남악 지리산

구름도 닿지 못한 천왕봉 … 천상과 세상 구분도 차별도 없는 땅이로다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8-30 19:31:16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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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파른 산중에 조성된 법계사
- 그곳 오를수록 숨이 턱에 차지만
- 머릿속은 청량하게 맑게 비워져

- 이른 새벽 드러난 천왕봉 일출
- 신령하고도 묵직한 고요함 느껴
- 높은 곳에 사찰 둔 까닭 깨달아

- 치원, 동쪽 세존봉 아래 바위서
- 서쪽 바위로 활 쏘아 수련하니
- 뒷날 동쪽 바위는 문창대로 불려

오행(五行)사상이 생기고 나서 서국(西國·중국)에서는 중앙의 숭산을 중심으로 동 태산, 남 형산, 서 화산, 북 항산을 오악(五嶽)으로 삼는다. 신라에도 오악이 있으니 중앙의 부악(父嶽·팔공산)을 중심으로 동 토함, 남 지리, 서 계룡, 북 태백이다. 왕경의 낭산(狼山) 등 삼산(三山)과 함께 오악에 제사 지내는 것은 선덕왕(37대 632~647년 재위)대에서 비롯되었다 하니 서국의 영향이 있었겠지만 이전에도 산악에 대한 숭배와 신앙은 있었다.
   
민족의 영산 지리산 주봉 천왕봉 일출. 정상에 서면 그곳이 곧 땅의 세상과 천상의 경계이니 구분이 무슨 소용이랴. 산청군 제공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사람의 무리가 처음 몸을 의지한 것은 산이었고 평지로 내려온 뒤에도 등 뒤를 받쳐주는 아버지처럼 가까이, 혹은 멀찍이 버티고서 바람을 막아주고 성(城)이 되어주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끝없는 줄기로 이어져, 옥토의 든든한 뼈가 되고 근육이 되는 산은 열매며 나물이며 뿌리에, 땔감까지 쉼 없이 길러 수천수만 년을 사람에게 베풀어주니 어머니의 마음도 품은 듯하다. 하지만 그 너그럽고 고마운 산도 한 번 화를 내면 수많은 목숨을 휩쓸기도 하니 그저 재해가 아니라 산신의 노여움으로 여겨 두려워하고, 신령함을 믿어 경배하게 된 것이리라. 하물며 아담하여 정겨운 산들도 그러한데 남악(南嶽)으로 삼고있고 신라에서 가장 높은 지리산이야….

과연 그러하다. 한 발 한 발 오를수록 숨은 턱에 차고 다리는 천근만근이 되는데도 가슴은 알 수 없는 영기(靈氣)에 서늘해지고 머릿속은 청량한 기운으로 맑게 비워진다. 아, 산이여! 소리치고 싶지만 아직 올라야 할 길이 남았으니 말없이 지켜보고 있을 산신이 두려워 더욱 걸음을 조심한다.

앞장선 무영의 걸음도 힘겨워 보이더니 눈앞에 ‘지리산 법계사(智異山 法界寺)’ 편액이 걸린 일주문이 나타나고, 그 아래 돌 사이를 흘러내리는 물을 받는 작은 돌샘이 있다. 절에서 마련해놓았을 작은 표주박에 물을 떠 치원에게 건넨 무영은 넘쳐흐르는 물을 손으로 받아 이마와 얼굴의 땀부터 훔친다.

“물이 매우 달구나.” 한 모금에 표주박을 비운 치원은 감탄한다. 무영이 표주박을 건네받아 목을 적시는 동안 고개를 들어 절집을 바라보던 치원이 혼잣말처럼 묻는다. “저 절에는 무엇이 있을까?” 무영도 고개를 들어 가파른 위쪽 절집을 바라본다. “이리 높은 곳에 불사를 일으킨 까닭이 있지 않겠습니까.” 치원은 고개를 끄덕이고 앞서 계단을 오른다.

■천왕봉에서 깨치는 ‘법계’의 뜻

   
법계사 전경. ‘법계’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를 의미한다. 정면의 봉우리가 세존봉이다.
동국(東國) 땅에서 가장 높은 곳(해발 1450m)에 위치한 법계사는 적멸궁(寂滅宮)이니 대웅전을 적멸보궁이라 하고 불상은 없다. 대신 불상이 있어야 할 자리 뒤에 밖을 내다볼 수 있는 큰 창이 있고, 창밖 위쪽을 보면 벼랑 같은 수직의 큰 바위 위에 삼층석탑이 얹혀있다. 연기조사가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이다. 치원은 적멸보궁을 나와 옆길로 바위가 있는 곳으로 오른다. 가파른 산세라 너른 공간을 확보할 수 없으니 계단식으로 올라가며 불사를 조성한 것인데 사리를 봉안해야 할 위치에 큰 바위가 있으니 아예 그 위에 석탑을 조성한 것이다. 하필 이 높은 곳에, 저처럼 힘겨운 공력으로 기어이 불사를 일으킨 까닭은 무엇일까.

“힘든 길을 찾아오셨습니다.” 돌아보니 석탑 오른편 법당에서 나온 듯 노승이 합장한다. “찾는 신도들이 많지 않겠습니다.” 치원의 말뜻을 알아들은 노승은 빙그레 웃음을 짓는다. “인연이 닿으면 힘든 길이라고 걸림이 되겠습니까. 작은 살림이니 산중이라도 부지런히 육신을 움직이면 부처님 모시기에 부족하지 않고요.” 왕실이나 귀족이 아니더라도 많은 신도에 의지하려는 것이 일반적인데 낯설다. “그렇더라도 하필 이 높은 곳에….” “연기조사의 깊은 뜻을 누가 감히 말로 할 수 있겠습니까. 그래도 천왕봉에 올라보면 저마다 생각하는 바가 있는 모양입니다.” 노승은 석탑에 눈길을 둔 채 더는 말이 없다.

   
법당에서 밤을 보내고 이른 새벽 치원은 천왕봉에 오르니 동쪽하늘 저 멀리 번져오는 여명에 사방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낸다. 모두 발아래인 땅의 세상. 서쪽 산줄기에는 구름마저 중턱에 걸려있으니 발을 디디고 선 거기에서부터 천상일 수도 있으리라. 세상과 천상, 구분의 의미가 무색하지 않은가.

“아∼!” 먼저 탄성을 터뜨린 건 무영이다. 그 바람에 치원은 탄성을 삼킨다. 장엄, 아니 신비. 아니다, 신령함이다. 수많은 일출을 보아왔고 해운포 동백섬에서는 가슴 떨리기도 했지만 천왕봉에서 만나는 일출은 또 다른 기운이다. 설렘은 당치 않다, 어찌 그런 가벼움을. 묵직하지만 무겁지 않다. 온몸이 서늘해지지만 두려움 없는 청량함으로 의식이 고요해진다. ‘법계(法界)’는 구분도 차별도 없는 진리 그 자체인 ‘진여(眞如)’를 뜻하지 않는가. 조사께서 구분이 무의미한 천왕봉 아래에 부처의 사리를 모셔 법계라 한 까닭이 그것이라면….

■동쪽 문창대와 서쪽 향적대

   
자연 바위 위에 조성된 보물 473호 법계사 삼층석탑.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했다.
다시 법계사로 내려오며 밝은 빛 아래에서 보니 일주문 가까운 곳에 아래로 석벽을 이룬 너럭바위가 대청 만하다. 그곳에서 좌우를 둘러보던 치원이 동쪽 아래 세존봉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무영을 돌아본다. “저 봉우리 바로 아래 바위 모습이 어떠하냐?” 무영이 한눈에 살펴보고 답한다. “대(臺) 바닥을 두 개의 입석이 등을 받쳐주듯 서 있으니 든든해 보입니다.” 이번에는 서쪽으로 고개를 돌린 치원이 제법 먼 곳에 우뚝 돌출된 바위를 가리킨다. “저 바위는 어떠하냐?” 무영이 일별하고 답한다. “동쪽 대와 대적하는 듯 보입니다.” 치원이 양 손바닥을 마주치고 껄껄 웃는다. “제대로 보았다. 내 앞으로 법계사에서 공부할 때는 동쪽 대에서 서쪽 저 바위로 활을 쏠 것이다. 다음에 올 때는 서쪽 바위에 세울 과녁을 염두에 두어라.” 세존봉 아래의 동쪽 대는 뒷날 사람들이 치원의 시호 ‘문창후’에서 따 ‘문창대’라 이름 지었고, 서쪽 과녁의 바위는 향적대라 불렀다.

“불법을 공부하시며 어찌 활을 쏘신다 하십니까?” 고개를 갸웃거리는 무영에게 치원은 선선히 대답한다. “불법 공부야 해인사에서 충분하지 않았겠느냐. 조사께서 그 먼 천축국에서 이곳까지 찾아와 불사를 일으키고 법계사라 한 것은 진여를 무언으로 설(說)함일 것이다.” 어렵다, 무영이 두 눈만 끔뻑거리자 치원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뜻은 풍류도에 두었으나 내내 모자란 것이 있었는데 이제 그 실마리를 찾은 듯싶구나. 구분 없는 진여의 세상이면 궁극이지, 암.” 화두를 잡은 것만으로도 모든 고민을 잊은 듯 치원의 환한 낯빛에 무영도 덩달아 밝은 미소를 짓는다. “주지에게 나를 밝히고 양해를 얻어야겠구나.” “그럼 저는 서쪽 대를 살펴보고 과녁을 생각하겠습니다.” 벌써 발길을 돌리려는 무영을 치원이 막아선다. “예부터 선비가 말 타기와 함께 활쏘기를 익히는 것은 심신을 단련하고 정신을 집중하는 수련이니 과녁이라야 그저 화살을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면 된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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