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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치원…그의 길 위에서 생각한다 <21> 월영대와 ‘인백기천’

달그림자 취해 붙인 이름 월영대… 마산 백성에 ‘인백기천(人百己千)’ 정신 전파

  • 국제신문
  • 디지털뉴스부 inews@kookje.co.kr
  •  |  입력 : 2020-06-21 19:53:45
  •  |  본지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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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비들 배움 열망 유달리 강해
- 보름 만에 십시일반 강원 건립
- 그곳서 본 달그림자 풍광 감탄
- 치원, 그 자리서 ‘월영대’ 명명

- 강론 현장 모여든 선비·서생에
- 학문 의미·근본 자세 전했지만
- 그들은 치원의 성과에만 주목

- “남이 백번하면 나는 천번한다는
- 각오를 부적 삼아 노력했을 뿐”
- 과한평가 마땅찮단 치원의 답에
- 제자들, 그제서야 본질 깨우쳐

얼마나 절실하고 한마음이었는지 여실하다. 아비가 재물을 크게 모았다는 평민 서생이 먼저 큰 몫을 감당하겠다고 나서자 두품의 고하를 막론하고 십시일반으로 더했다.
   
신라말 고운 최치원이 즐겨 찾았다는 경남대 입구 댓거리에 위치한 월영대는 고려·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그를 기리는 수많은 선비의 순례지가 되었다. 이후 주변 옛 해안은 매립되고, 인근에 큰 건물이 들어서면서 달빛조차 볼 수 없는 도심의 오지로 전락했다. 창원시는 과거 월영대의 명성을 재현하기 위해 신월영대 부지를 찾고 있다.   창원시 제공
치원의 별서(別墅·별장) 가까운 곳에 터를 잡아 짓기 시작한 강원(講院)은 보름 남짓에 마무리가 눈앞이다. 태수는 치원이 도착하던 날 이후 다시 모습을 보이지 않지만 그의 배려가 크다는 것을 모두가 안다. 유랑 중인 중앙관리에게 너무 드러내는 호의는 자신의 처지를 난처하게 할 수 있어서겠지만 그래서 치원은 오히려 마음이 놓인다. 가야의 성을 받은 후예로서 혼란의 시대에 달리 품은 마음이 없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 말이다.

강원 자리에서는 맑고 푸른 합포만(마산만)이 한눈에 들어온다. 만 가운데 작은 섬과 그 건너 낮은 산까지 한데 어울린 풍경은 그대로 한 폭의 그림이다. 끝없이 펼쳐진 망망한 바다는 장쾌함으로 사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면 아늑한 호수처럼 자리한 푸른 바다의 만은 배를 띄우기 위해 돛을 올리는 굳은 각오의 설렘을 준다. 치원이 해가 지도록 그 자리를 지키며 일어날 생각을 않자 강원 공사를 주도하던 평민 서생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이 자리에는 대를 쌓아야 할 것 같습니다.” 치원은 혼잣말인 듯 대꾸한다. “이토록 아름다운 풍광이라니. 남쪽바다의 복이로구나.” “저녁상을 여기로 내오도록 하겠습니다.” 치원은 서생을 돌아본다. 재물이 많다지만 옷차림은 그저 정결할 뿐 검소하고, 얼굴빛은 맑은 데다 눈빛은 투명하다. “그저 자네와 술잔이나 나눴으면 하네.” 서생은 기쁜 웃음을 지으며 얼른 걸음을 옮긴다.
   
최치원이 쓴 월영대 입석과 당나라 황제에게 하사받은 자금어대.
■일필휘지로 쓴 ‘월영대’

때맞춰 보름이다. 해가 지고 오래지 않아 옅은 구름을 걷어내고 보름달이 둥근 얼굴을 드러내자 어둑하던 합포만은 반짝이는 빛의 수면이 된다.

일렁이는 물결이 달빛을 받은 것이지만 거친 파도에서는 볼 수 없는 고요히 소곤거리는 듯한 풍광이다. 두척산(무학산) 물이 맑고 달다더니 술맛도 그러하니 잠시 번뇌 가라앉은 무아의 지경이다. 반짝이는 물결에 눈길을 둔 치원은 말없이 술잔만 기울이고 서생은 잔이 비면 술을 채울 뿐 무언가 기대하는 기색도 무료한 빛도 없다.

얼마가 흘렀을까. 문득 휘영청 밝은 둥근달이 합포만 수면 위에 내려앉은 듯 선명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오호!” 막힌 숨이 뚫린 듯 저절로 터지는 치원의 탄성에 서생도 이전의 합포만을 떠올려본다. 덩달아 탄성을 터뜨릴 뻔한 서생은 함께하는 사람에 따라 자연의 풍광마저 이토록 달라지는 것인가 놀랍다.

많은 달을 보지 않았던가. 창밖으로 달을 보았고, 밤길을 따라 달을 보았고, 강가에서 보았고, 강물에 드리운 달을 보았고, 바닷가에서 달을 보아 시(詩)에 차용한 것도 여러 편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달그림자(月影)를 노래한 적은 없다. 눈이 어두워서였던가, 마음이 어두워서였던가. 아니면, 오직 합포만이기에 월영인가. 치원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서생에게 부탁한다. “지필묵을 준비해주겠나?”

가까이에 밝힌 작은 등잔 불빛보다 높은 하늘 보름달이 평상에 펼친 종이 위에 어른거림 없는 빛을 준다. 서생이 벼루에 넉넉히 먹을 갈고 비켜나자 치원은 굵은 붓을 골라 듬뿍 먹을 적시더니 일필휘지로 ‘월영대(月影臺)’ 석 자를 쓰고 붓을 내려놓는다. “여기에 대를 쌓는다면 이 이름이 좋을 듯하네.” 글과 만에 드리운 보름달을 번갈아 돌아본 서생은 감탄한다. “과연, 그렇겠습니다.”

■인백기천의 부적

   
1920년대 엽서 속의 월영대.
강원이 문을 열자 신분의 차이를 넘어 근동의 많은 선비와 서생이 모여들었다. 치원은 강론에 앞서 학문의 의미와 그에 임하는 근본정신, 자세 등을 먼저 말하였다. 이를테면 유학은 당대 사상의 주류이며 관리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익혀야 하는 학문이지만 그 근본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仁)이며,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예(禮)에 있음을 한시도 잊지 않아야 한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치원의 말이 끝나자마자 손을 들어 하는 질문은 인과 예가 아니라 성취이다.

“선생께서는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당에 들어가 불과 6년 만에 그 어렵고 치열하다는 빈공과에서 장원급제하셨습니다. 또한 10여 년 내에 빛나는 문명(文名)으로 당에 이름을 떨치시고 황제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으셨으니 하늘 아래 누가 천재임을 동의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저희 같은 평범한 학인이나 둔재들로서는 아무리 애를 써도 그 발치에나 이를 수 있을지 그저 아득하고 막막합니다. 부디 작으나마 노력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마음은 실망스러웠으나 치원은 내색하지 않는다. 사상이며 역사며 모든 학문은 인간을 기반으로 인간을 탐구하는 것이지만 그러기에 한편 인간이 어우러진 세상을 다스리는 기본이기도 하다. 그러니 학문을 익힌 자라면 그 다스림에 기여하고, 일정한 영예를 얻고 싶은 것이 당연한 일이고, 그를 위해서는 학문의 성과를 제도적으로 인정받아야 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기도 하다. 하지만 성과를 좇는 데에만 매달려 본질을 놓치거나 외면하는 우(愚)가 커져가는 현상은 참으로 안타깝다.

   
1937년 마산부의 관광안내도에 실린 월영대 사진.
“세상에 천재가 있을까요? 기억이나 응용에 다소 차이는 있겠으나 타고난 천재라는 말씀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관심을 둔 건 재미를 느껴서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른 길을 택했을 겁니다. 재미가 있었기에 게을리하지 않을 수 있었고, 당나라에 들어간 뒤로는 여러 여건이 어려웠기에 더욱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제가 마음에 깊이 담았던 것은 ‘인백기천(人百己千)’ 오직 그것이었습니다.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하리라는 절박한 각오였지요. 그렇지만 노력이 반드시 결과를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인백기천, 그것은 일종의 부적이었습니다. 물론 부적의 영험을 믿은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믿음을 가졌기에 인백기천의 노력에 지치지 않을 수 있었고, 결국 부적이 영험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습니다. 여러분 모두도 스스로의 각오를 부적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영험이 찾아올 것을 믿으십시오. 오직 학문의 길에서만이 아니라 채소를 기르는 농부의 길에서도, 그릇을 빗는 장인의 길에서도, 재물을 모으려는 상인의 길에서도 말입니다.”
   
남이 백을 하면 나는 천을 노력한다는 의미의 ‘인백기천(人百己千)’. 이 문구는 최치원이 당에서 공부할 때 스스로의 믿음을 부적으로 삼은 상징이었다. 오늘날 우리의 고3 수험생이나 취업준비생이 키링(열쇠고리)이나 핀 버튼 배지, 부적 등으로 지녔으면 하는 제안을 해본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아쉬움과 부러움 섞인 눈빛이다. 치원은 서안(書案) 위에 둔 붉은색 천주머니에서 자색 끈에 매달린 금색 패를 꺼내 보인다. 패에는 가운데 직선 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여섯 마리 물고기가 수놓아져 있다.

“이것이 당 황제로부터 자색 관복과 함께 하사받은 어대입니다. 패에 물고기가 수놓아져 어대라 하는데 이는 황궁에 출입할 수 있는 징표로, 해당하는 직에 봉해지면 내려지는 것입니다. 이국인으로서 자금어대를 하사받았으니 영광된 일이기는 하나 너무 과한 평가는 온당치 않습니다.”

사람들은 비로소 깨우친 바가 있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김정현 객원논설위원·작가

일러스트 = 백정록 / 제자(題字) = 이희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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