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쇠락하던 봉황역~김해중 800ｍ
- 4년 전 예술인 정착으로 변화
- 새 상권 일구고 라이브 무대까지
- 젊은 층 입소문 타고 명소 부상

- 최근 사진관 등 40곳 새로 개업
- 주변 벽화골목 돌아보는 재미도

땟국이 흐르는 담벽, 이끼를 모자처럼 눌러쓴 기와 지붕. 경남 김해시의 옛 도심인 회현동에 가면 쉽게 마주치는 장면이다. 하지만 협소한 도로를 중심으로 4년 전부터 변화가 시작됐다. 한 부류의 예술인들이 보금자리를 틀면서부터다.

예술인들이 식당과 카페를 열고 작은 공연을 무대에 올리면서 변화가 감지됐다. SNS로 무장한 젊은 층이 떼로 몰려들고 ‘장사가 된다’는 입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새싹 돋아나듯 사진관, 파스타 가게 등이 하나 둘 문을 열기 시작했다. 회색의 골목길에 온기가 퍼져 나간 것도 이즈음이다.

이제는 이름도 ‘봉리단길’로 바뀌었다. 봉리단길은 경전철 봉황역에서 하차해 김해중학교 앞까지 이르는 800ｍ 남짓한 길이다. 주변의 ‘이야기가 있는 벽화 골목길’까지 내리 훑으면 1시간30여 분이 훌쩍 지난다.

	경남 김해시 봉리단길에 문을 연 이탈리안 레스토랑 ‘안인 김해’. 정미소를 식당으로 개조하면서 옛 모습을 살려 명소가 됐다. 박동필 기자

■2000년 가야의 향기 쌓인 봉리단길

부산에서 김해 봉리단길로 가려면 부산김해경전철 봉황역에서 하차해야 한다. 역명은 가야시대 집단 취락지로 구릉지대인 봉황대에서 따왔다. 2000년 전 금관가야 창시자 수로왕과 허왕후의 전설이 스린 곳이다.

얼마 걷지 않아 ‘카페 봉황 1935’라는 간판이 걸린 건물과 마주친다. 지역 터줏대감인 허은(66)씨가 리모델링한 곳으로 일제 때 적산가옥이었다. 건물 마당에는 엽서크기의 사진 수백장이 빨랫줄에 매달린 채 바람에 팔랑인다. 지역 문화예술단체가 이곳을 홍보하려고 ‘경전철 문화산책’이라는 행사를 하며 마련한 이벤트다.

봉리단길은 폭 6ｍ 남짓으로 중앙분리선 표시가 없다. 발길을 옮기자 붉은 기를 올린 점집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동행한 마을 해설사인 현순연(64)씨는 “봉리단길은 아직 미완성이다. 1980년대에 가야시대 유적인 봉황대의 기운을 받는다며 점집이 생겼지만 서서히 문을 닫고 있다”고 말했다.

멋진 금속 공방 제품을 판매하는 은모루, 갈색 빛깔의 처마가 멋스러운 갈나무 사진관은 최근에 봉리단길의 새 식구가 됐다.

봉리단길 끝단부의 이탈리안 레스토랑 ‘안인 김해’는 과거 정미소였다. 주인이 건물을 리모델링하면서 식당 홀에 낡은 정미소 설비를 그대로 둬 방문객들을 추억 속으로 안내한다. 길 주변에 새로 문을 연 가게는 40여 곳에 달한다.

■회현종합상사… 예술인의 보금자리

	봉리단길의 전경.

봉리단길이 오늘의 모습을 갖추는 데에는 예술인들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핵심 가게인 회현종합상사 건물은 모두 6곳의 가게가 모인 집합체다. 화가인 김혜련(49)씨가 운영하는 밥집 하라식당과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카페 낙도맨션, 국숫집인 낭만멸치, 지역 가수가 만든 93빈티지(93년생이 주인인 옷가게), 바느질 공방인 니들두들 등이 이 건물에서 영업 중이다.

김 씨는 4년 전 동료들을 이끌고 이곳에 안착했다. 카페 봉황 1935를 운영하는 허은 씨와 봉리단길의 역사를 만든 창립멤버다.

봉리단길에는 밥집과 카페, 공방 같은 하드웨어만 있는 게 아니다. 뮤지컬, 피아니스트 라이브 공연을 접할 수 있는 등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공간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곳 주인공 중 한 명은 곽지수(51)씨다. 봉리단길을 소개하는 봉황TV를 개설해 유튜브로 홍보한다. 극단대표이기도 한 그녀는 주민들이 출연하는 공연도 준비 중이다.

■사람냄새 나는 이색 벽화 골목길

봉리단길을 섭렵했다면 이제 회현동민원센터 뒷길에 숨어 있는 ‘이야기가 있는 벽화골목’을 둘러볼 차례다. 이 골목은 김해시가 마을재생사업으로 2015년부터 만들었다. 특이한 점은 지역 주민들의 살아 있는 사연들을 벽화의 소재로 삼았다는 것이다. 골목길로 접어들자 왼쪽으로 단층집 옥상 위에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현 해설사는 “과거 존경받았던 초등 교장선생님을 추억하려고 건물 옥상에 평소 사용하던 의자를 올려놓은 것”이라고 말했다. 담벽에는 인자했던 교장 선생님이 제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유기견을 키우는 집주인의 사연을 담아 담벽에 그린 ‘개를 안고 있는 여인화’도 눈길이 간다.

시 박창근 도시디자인과장은 “회현동 주변은 쇠락했던 곳으로 도시 재생사업이 진행 중”이라며 “봉리단길도 지역의 명소로 바꾸기 위해 예술인,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전했다. 갖가지 사연을 담은 봉리단길은 앞으로 봉황대길로 이름이 바뀔 전망이다. 김해시가 주민 여론조사를 한 결과 주변 사적지인 봉황대 이름을 붙이는 게 좋다는 여론이 우세했기 때문이다. 박동필 기자